충남 홍성의 광천과 대천의 중간지점에 주포(周浦)라는 곳이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되는 곳이 ‘갈매못 순교성지(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갈매못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있는 ‘보령 갈매못 순교성지’는 천주교 성지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는 성지로 지난 2013년 2월 충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188호로 등록됐다.
갈매못 성지는 1866년 3월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보령 충청수영으로 이송된 마리 다블뤼(1818~1866) 천주교 조선교구장을 비롯한 5명이 군문 효수를 당한 곳이다. 이후 1925년 정규량·최말구 신부 등이 현장을 확인했으며, 1975년 순교 터에 다섯 성인의 순교 기념비와 야외제단이 만들어졌고 1999년 순교기념관, 2007년에 대성당이 건립됐다. 갈매못이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이라 해 ‘갈마연(渴馬淵; 갈증을 느끼는 말이 목을 축이는 연못)’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풍광이 뛰어나 해마다 순례객과 관광객 등 4만여 명이 순교지를 찾고 있는 성지다.
갈매못 순교성지가 있는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는 보령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천면은 20여 개의 유인도와 48개의 무인도가 속해 있다. ‘오천’(鰲川)은 자라 ‘오(鰲)’자에 ‘내 천(川)’자가 어우러져 이뤄진 이름이다. ‘오천’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해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영보리의 ‘영보 (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 있다’는 뜻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갈매못은 수군들이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였으며, 형장은 바로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당시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지키는 3개의 수영이 있었다. 충무의 경상 수영, 여수의 전라 수영, 오천의 충청 수영이 그곳이다. 각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상주시켰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함께 있었다. 오천성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축성됐으며, 높이 3m, 길이가 3000m나 되며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정3품관의 수도절도사가 상주했던 곳이다. 오천항은 군선 100여 척이 정박하고, 수군도 3000명이 항상 주둔했던 충청 서부지역의 군항이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충청 수군절도사가 주둔했던 장교청 건물과 진휼청만이 남아 있다.
■ 순교성인, 외연도를 바라보며 처형됐던 곳
외연도는 보령시에 속해 있는 70여 개의 섬들 중에서 가장 멀리 있는 섬으로 1846년 6월에 프랑스 함대 세실 사령관이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외연도에 정박했다. 기해박해 때(1839년)에 앵배르, 모방,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를 상자에 남겨 놓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을 조정에서는 ‘조선 영해 침입 사건’으로 간주해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66년 3월 30일에는 흥선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의 수영을 택했다.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당진 신리성지)을 비롯해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 황석두 루가(괴산 영풍성지), 장주기 요셉(평택시 요당리성지) 회장 등 5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바라보고 목을 쳐서 처형하게 했던 곳이 바로 ‘갈매못 순교성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이다.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8000여 명 이상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됐다.
흥선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하려는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의 도움을 이끌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으려고까지 했었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할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텐진 베이징 조약). 대내외적인 변화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폈다. 1866년 봄부터 시작된 박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8월), 병인양요(1866년 10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1868년)이 발생하자 더욱 거세졌고 아울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강화됐다.
■ 순교자들의 피가 젖어 있는 처형장 ‘갈매못’
갈매못 순교성지는 너른 마당에 순교 터를 알리는 비석과 순교성인비, 다섯 성인의 첫 매장 터가 있다. 순교비 너머에는 그날 성인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1866년 3월 23일 한양 의금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은 이곳으로 끌려왔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당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돼 있어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6년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외연도가 이곳과 가까운 것도 이유였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함으로써 서양 오랑캐들을 내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던 것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당진 신평의 신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23일에 조선에 입국해 수원 인근의 샘골에 머물며 조선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충청도 내포 지방에 있는 다블뤼 주교가 기거하는 곳 근처로 이사해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위앵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7월 18일까지 내포에 머물다가 합덕의 세거리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조선의 생활 방식에 빠르게 익숙해져 갔고, 조선어 또한 빨리 배워 1866년 2월경부터는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었고, 조선말로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1866년 병인년에 박해가 발발하자, 교우들에게 공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고백할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다블뤼 주교가 활동하던 마을로 가서 포도청에 자수했다. 그들은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와 함께 홍주를 거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됐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는데, 그때 황석두의 지식과 능변을 아까워해 포졸들에게 황석두만은 체포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석두는 한양으로 압송되는 주교를 수 십리 동안 뒤따라가 체포돼 주교와 함께 압송됐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됐다. 이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됐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으로 이송돼 3월 30일에 순교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다섯 순교성인을 비롯해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피가 젖어 있는 처형장 ‘갈매못 성지’는 1925년부터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해, 1975년에 순교복자비가, 1968년 10월 6일 이들 신부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품에 올랐다. 1984년 5월 6일에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품에 올랐고, 순교성인비가 세워졌다.
또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내부에는 다블뤼 주교의 중백의와 저서, 친필 서명을 비롯해 오메트르 신부의 제병기, 다블뤼 주교가 머물던 당진 신평의 신리공소 주교관 주춧돌, 교회사 편찬 작업 중인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가의 모습 모형, 갈매못에서의 순교장면을 그린 순교화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입구 좌우로 우뚝 선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가 동상을 뒤로 하고 ‘승리의 성모성당’이 있다.
이곳 ‘갈매못 순교성지’는 순교의 고통만큼이나 순교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생명의 물이 돼 깊이를 채우고, 그 생명의 빛깔은 저녁노을과 함께 ‘갈매못’ 앞바다에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