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 시가지를 중심으로 남쪽에 광덕산(699.3m)이 있다면, 동북쪽에는 성거산(579.1m)이라는 명산이 자리 잡고 있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분주할 때 직산면 ‘산헐원’을 지나다가 동쪽의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 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성거산’이라 부르게 했다고 하는 산이다.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면 백제 도읍지였던 위례산성에 닿게 된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 신앙생활을 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 돼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 소학골,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고 한다. 또한 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알려진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맡겨져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 교우촌, 신자들이 형성한 산골 신앙공동체
성거산 성지 옆에 위치한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Calais) 신부와 페롱(Feron)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다. 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Mutel) 주교, 두세(Doucet) 신부, 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재의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 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 줄무덤에 안치돼 있다. 현재 제1 줄무덤에 총 38기, 제2 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가 총 107기였다고 이장(移葬) 작업에 참여한 6명의 증인이 증언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병인박해 때 내포 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다.
1800년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은 곳곳에 있었다. 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신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해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덜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공동체였다.
성거산 성지 현황을 보면 제1 줄무덤에서 제2 줄무덤까지의 거리가 530여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에는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돼 있다. 또 넓은 성모 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돼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돼 있다. 제2 줄무덤부터 시작하는 2km여 거리의 ‘순교자의 길’에는 순교자와 관련된 많은 조각품과 한국의 103위 성인, 성거산(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불 등이 설치돼 있어 조용히 묵상할 수도 있다. 2011년 5월 7일에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건립한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에 대한 봉헌식을 가졌다.
한편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거산 성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조용한 가운데 공기가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순례를 온 순례자들은 꼭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전한다. 특히 계절마다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2008년 12월 22일 성거산 성지는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 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됐다.
병인박해 때 소학골 교우촌 출신 배문호(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등 이름이 알려진 5명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중에서 차령산맥 해발 500고지의 높은 지대에 위치해 보기 드문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성거산 주변에는 박해 당시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해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교우촌이 산재해 있어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여러 선교사제들이 숨어 지내며 암암리에 사목활동을 하던 곳으로, 박해 중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제1 줄무덤과 제2 줄무덤에는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다.
제1 줄무덤을 나오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성모 광장을 지나 제2 줄무덤 앞까지 이어지는 14처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타 언덕처럼 산을 따라 오르면서 예수님이 받았던 고통을 묵상하는 길이다. 14처 조각상 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순례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생화는 무명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꽃들입니다. 성거산 성지’라는 작은 안내문이 보인다. 그제야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생명의 신비와 변치 않는 자신만의 모습을 간직한 야생화가 순례자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다가온다.
야생화가 상징하는 순교자 정신과 예수님이 짊어진 고통이 겹쳐지는 십자가의 길을 마치면 ‘제2 줄무덤’에 이르게 된다. ‘제2 줄무덤’을 바라보고 서 있는 4명의 순교자 조각상은 처참하게 상처 나고 깨어진 얼굴을 한 순교자들이 극심한 수난 속에서도 서로 어깨를 부축하는 형상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자’며 마지막 남은 생명이 외치는 무언의 소리가 순교자 조각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숭고함이 전해진다. 조각상 밑에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라는 성경구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성거산 성지 순교자들이야말로 하늘을 가까이한 곳에서 위에 있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제2줄무덤에서 나오면 성거산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벗하며 살았던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 터’(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길 이름은 ‘순교자의 길’이다.
길옆에는 103위 성인 이름, 세례명과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가 적힌 유리병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103위 성인 이름과 세례명을 읽고 짧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바치며 ‘순교자의 길’을 걷기만 해도 마음 한편에는 뜨거운 감정이 일어난다.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아 건립한 순례 미사 봉헌 장소인 ‘병인박해 기념성당’의 초입에는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루르드 성모와 비슷하지만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기울인 모습으로 발현한 ‘바뇌의 성모상’이 서 있다.
성거산 성지 소학골 교우촌 터에는 아담한 초가집 세 채가 복원돼 있다. 신유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모여 만든 성거산 교우촌은 1920년까지 120년 동안 그 역사가 계속되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다만 복원된 초가들이 옛 교우촌 풍경을 일부라도 전해 줄 뿐이다. 교우촌의 외형이 사라진 지는 100년이 넘었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신앙 선조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은 지금도 우리들의 시선을 신앙의 길로 재촉하고 있는 듯하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