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지역, 북접에 속해 인접한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합세해 전쟁 전개
1894년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한산, 비인, 서천으로 나눠 살펴 봐야
전북 지역 동학농민군, 웅포나루에서 한산 신성리 나루를 이용해 건너
한산읍성·서천읍성 점령했던 동학농민군 잔당, 흩어져 마을에 진을 쳐
서천과 한산은 충남 지역의 서남쪽 맨 끝자락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북 군산과 마주하고 있다. 금강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긴 물줄기이며,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 뜬봉이라는 샘에서 첫 물흐름을 시작해 군산·장항까지 장장 1000리(401km)에 이르며,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수많은 지천이 모여 총 유역면적 9885㎢의 광활한 비단 폭을 만들고 있다.
백제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이 백제를 배신한 신라를 심하게 공략하자, 신라는 외세인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백제를 공략했다. 이때 당나라 군대는 지금의 금강 어구인 백강 왼쪽 강기슭에 상륙했다. 금강을 백마강이라고도 하는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성을 공격할 때 ‘백마를 미끼 삼아 용을 건져 올리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백제가 멸망하자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이 지금의 서천군 한산면에 있었던 주류성(지금의 건지산성)에 군사를 모아 3년 동안이나 부흥 운동을 계속했으나 허사였다.(주류성에 대한 주장은 지금의 홍성군 장곡면의 주류산성, 또는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우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894년 갑오년에 전라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자 충남의 회덕, 진잠, 공주, 은진, 한산, 비인, 연산, 서천, 서산, 홍성, 당진, 면천, 보령, 전의, 연기, 정산 같은 곳에서 남접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시인 신동엽은 동학농민혁명을 그린 서사시 ‘금강’ 제21장에서 ‘비는 멎고 하늘은 맑았다/ 아침 눈 부신 태양이 동쪽 먼 산마루 위 떠 있었다/ 저 태양은 영원한 걸까/ 금강의 부드러운 물굽이가 멀리서 희게 빛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이 흘러가는 강물.’이라고 노래했다.

■ 서천·한산 동학혁명 갑오 초여름 시작
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은 한산 지역에서 갑오년 초여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천지역의 동학농민운동은 충청 서남지역으로 전북 군산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배경과 연계, 이해해야 한다. 서천지역의 동학 조직은 북접에 속해 있어 인접한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합세해 전쟁이 전개됐다. 또한 서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주로 2차 봉기로 분류된 시기에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기 전 서천지역의 상황은 한산, 비인, 서천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한산 지역에서 시작됐을 당시 을미년에 한산군수였던 백낙형(白樂亨)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의 판결문에 “갑오년(1894) 6월 9일 비류(匪類) 김선재(金善在), 서가량(徐可良)이 동학에 수창(首倡;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제창)하야 행태가 무상하다가 서학을 의적하야 악습이 무심하기로 군옥에 가두어…”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볼 때 한산 지역은 1894년 6월경부터 동학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산군수 백낙형이 ‘취당(聚黨; 목적이나 행동 등을 같이하는 무리를 불러 모음) 소요(騷擾; 많은 사람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술렁거림)죄’를 지은 동학 두령을 옥에 가두지 않고 민심에 따라 풀어준 사건을 두고 뒷날 문책하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한산 지역은 6월부터 관아를 위협하는 동학도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헌영의 ‘금번집략’에는 6월 29일 신시 무렵에 동학도 20여 명이 위국안민의 핑계를 대고 총과 창을 가지고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전라도 성당(聖堂)에서부터 방향을 바꿔 임천에 도착해 작청(作廳; 예전에 군아에서 아전이 일을 보는 곳)에 난입했다고 했으며, 인근 부여지역에서는 동학도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천 접소의 사람들이다. 돈 2만 냥을 7월 10일 이내에 모두 마련해 임천읍내의 중군 이씨의 집으로 보내지 않으면 너희들을 모두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산과 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전북 지역 고부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한산군은 교통과 활동은 금강을 끼고 전북 지역과의 교통은 3개의 금강의 나루(신성, 죽산, 와초)가 운영됐다. 전북 지역과 왕래하면서 인적교류가 이뤄진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의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산 지역의 동학농민군 봉기에 대해 한산면 야인리에 거주하면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 동학농민군의 봉기 활동상황을 최덕기(崔德基, 1874~1929) 일기인 ‘갑오기사(甲午記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산 지역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독자적으로 봉기한 전쟁보다는 봉기 이전에 조직된 동학 접주들이 전북 지역 함열(咸悅), 웅포(熊浦) 동학도와 부여의 임천, 양화지역의 수백 명의 동학도들의 지원을 받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에 가입시키고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한산에는 김약선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기포, 유회군들에게 밀려 흩어졌으나 1894년 11월 12일에 이르러 수천 명이 마산방면에서 야인리 앞길을 지나 ‘한산읍성(韓山邑城)’을 공격·점령했다. 서천군지에 ‘동학농민군들은 한산읍성을 손에 넣고 화양산에서 서천읍성으로 진격할 기세였다’고 한다. 화양산은 한산과 화양의 경계에 있는 100여m의 산으로 방어에 유리하고 공격에 불리한 지형조건을 갖춘 요새다. 화양산에서 동쪽은 한산의 움직임을 경계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곡창지대인 서천평야를, 남으로는 금강의 움직임을, 북으로는 한산으로 접근하는 관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은 유회군을 지휘하면서 서천읍성을 지켰고, 관군은 홍주와 남포에서 진격해와 18일 서천에 도착해 서천읍성에 머물고 있었다.

■ 전북 동학농민군 한산 신성나루 건너
다음날 관군은 한산 두문(斗文) 동쪽 기슭에 진을 치고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며 종일 총격전을 벌였다. 병사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동학농민군들은 두문 5개 마을에 불을 질러 거기에 살던 노씨 일가가 모조리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동학농민군들은 평소 두문마을 사람들이 화양 금당리 일대에 살던 사람들을 ‘물아랫것들’이라고 차별하고 업신여겼기 때문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관군은 20일 서천읍성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일에 경군이 홍산에 도착해 하루를 묵고, 20일 오후 한산에 도착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길산포 앞 1리쯤에서 동학농민군과 맞닥뜨렸다. 길산포에 도착 다리를 건너기 직전 경군이 일시에 사격을 가하자 동학농민군은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음날인 21일, 경군은 북쪽에 포진한 동학농민군 부대를 집중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한산의 수성장 김련(金鍊)과 김하은(金夏殷) 등은 토병 수백 명과 홍산 유장 최학래(崔學來)가 이끄는 보부상군을 거느리고 서천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서천읍성은 불에 타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서천 삼수동 뒷산으로, 또 다른 몇천 명은 서천 연포에 머물렀다. 이에 관군 쪽에서는 윤영성(尹泳成)이 북쪽 산로에서 공격하고, 이상덕은 남쪽 야로에서 공격하니 협공을 당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은 포살당하고 수십 명은 포로가 됐다. 이로써 한산·서천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은 경군에 패했고, 경군은 서천읍성을 탈환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 잔여세력은 여전히 남아 활동했고, 12월 3일에는 한산과 전라도 함열, 웅포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해 한산읍성을 함락시키고 읍촌을 모두 불태우고 물러났다.
갑오기사에 따르면 전북 지역 동학농민군은 웅포나루에서 한산 신성리의 나루를 이용해 건너왔다. 전북 남접 동학농민군이 한산 신성나루를 건너와 부여 양화면 수원리 접주 김시형(金時亨) 등의 협조를 얻어 인근 한산의 원산, 야인, 마산 요곡의 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의 동학도들이 주민들에게 강요와 협박을 통해 동학 활동을 9개월의 기간 동안 동학농민군의 1만 명 세력을 확보, 한산읍성을 점령하는데 안내자 역할을 했다. 한산 지역 동학농민군 최득용(崔得用)은 약탈과 방화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부 진압군이 내려오기 전 11월 12일 한산읍성은 함락됐다.
1894년 12월 4일 선무 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에 “홍산에서 한산과 서천 두 곳으로 출발 20일에 한산에 도착하니, 지난 12일에 동학농민군들에게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수백 호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타버렸으며, 각처에 있는 관아의 건물도 부서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유리(由吏:아전) 나종인(羅鍾寅)은 적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불에 타기까지 하였습니다. 서천읍성도 장차 도륙당할 듯합니다. 한산읍성 수성장(군수)과 읍의 이속(吏屬:아전들) 수백 명을 인솔하였고,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는 부상(負商:등짐장꾼) 50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나아가 진압하였습니다. 서천에 도착하니 서천읍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수천 명이 삼수동(三水洞)의 뒤편 기슭에서 머물면서 합류했고, 또 다른 수천 명은 포구 해안가에 모였습니다. 진압군을 거느리고 북산 뒤쪽에서 급습하여 적들을 몇백 명을 죽였습니다.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날이 어둡고 캄캄하여 쫓아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21일에는 한산과 서천 두 지역에서 군사를 나누어 도망간 적들을 정탐하여 붙잡아 죽였는데 그 수도 몇십 명이 됩니다. 즉시 포살하였습니다”라고 전했다.
한산읍성과 서천읍성을 점령했던 동학농민군의 잔당은 흩어져 각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쪽 금강 나루를 이용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구를 지키게 하고 화양 와초리를 거쳐 한산 숭문동(활동리)으로 향해 활동리에 머물고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잔당을 토벌했다는 12월 4일 자 진압군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내용이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서 밝히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