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성인·최양업 신부 생가 ‘새터성지’와 ‘다락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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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성인·최양업 신부 생가 ‘새터성지’와 ‘다락골성지’
  • 취재단=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학생기자단
  • 승인 2024.09.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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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10〉
다락골 최경환 성인·최양업 신부 생가터 새터성지의 최양업 신부 탄생기념 경당.
다락골 최경환 성인·최양업 신부 생가터 새터성지의 최양업 신부 탄생기념 경당.

칠갑산 굽잇길 켜켜이 돌아 돌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다락골(달을 안은 골짜기)에는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터에 조성된 ‘새터성지’와 ‘줄무덤성지’ 등 두 곳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새터성지’는 ‘길 위의 사제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에 자리하고 있는 성지다. 또한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줄무덤성지’는 불러줄 이름 하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다락골성지’는 인생의 시작(탄생, 삶)과 끝(죽음)이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들의 신앙은 아직도 이 다락골에서 거룩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고 청양 다락골 성지 안내문에 쓰여 있다.

‘새터성지’는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와 아버지인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 성인이 태어난 곳으로 ‘새터성지’와 다락골 ‘줄무덤성지’의 거리는 1㎞ 정도로 ‘새터성지’를 지나 ‘다락골성지’로 이어진다.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태어났고,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와 결혼해 다섯 형제를 낳아 성가정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이곳에 마련된 ‘최양업 신부 탄생기념 경당’은 “최 신부가 1860년 경신박해 때 생쌀을 먹으며 숨어지내던 어두운 울산 죽림굴을 재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청양 화성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청양 화성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가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청양 다락골(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은 굽이굽이 산비탈 중턱에 40여 가구의 민가가 모여 사는 두메산골이다.

경주 최씨 문중은 350여 년 전부터 다락골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고 한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오소산 산줄기 넘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바쳤다. 최양업은 다락골에서부터 단단해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훗날 그가 사제의 길을 걷는데 큰 힘이 됐다. 하느님,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온 생애를 바쳤던 최양업 신부의 시작을 ‘다락골성지’에서 찾을 수 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 무덤을 이루고 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했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최양업 신부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대전교구와 청양성당에서 이곳의 줄 무덤을 조사해 그중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을 밝혀냈다. 1982년 이곳에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했다.

이곳은 본래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청양에서 대천으로 국도를 따라 8㎞쯤 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소재지 조금 못 미쳐 국도변에 최경환, 최양업 부자상(父子像)이 보인다. 묵주와 성지(聖枝)를 들고 앉아 있는 최경환 성인, 그 옆에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의 부자상은 지난 1986년 8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곳이 이들 부자의 탄생지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청양 다락골성지.
청양 다락골성지.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다시 2.5㎞가량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에 ‘양업로(良業路)-성지 줄 무덤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마을 뒤 산길을 마저 오르면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14처를 만난다. 그 옆을 지나면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농민혁명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화성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를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됐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뤘다.

최인주가 슬하에 둔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는다. 이들은 박해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이후 다시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보낸다. 1839년 최경환은 가족을 비롯해 교우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하게 남아있다.
 

청양 새터성지.
청양 새터성지.

■ 새터성지, 최경환·최양업 생가터
줄무덤성지 입구에서 도로를 타고 아래쪽으로 1㎞ 정도 내려가면 새터(新垈) 마을이 있다. 다락골의 입구인 이곳을 ‘새터’라 부르는데, 이곳은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이 태어난 곳이다.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는 최인주다. 그는 12살이 되던 해에 서울에서 홀어머니 경주 이씨를 모시고 살다가 1791년 진산사태로 시작된 신해박해를 피해 이곳 ‘샛터’로 이주, 정착하게 됐다. 최인주는 성장해 결혼을 하면서, 슬하에 3형제를 두게 된다. 막내아들이 1984년 5월 6일 시성된 최경환(프란치스코)이며, 최경환의 여섯 자녀 중 장남이 최양업(토마스) 신부다. 이때부터 이곳에서 700여m 떨어진 다락골에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해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된다. ‘새터성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사제 부자가 태어난 곳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또 성직자 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한없는 영광과 함께 온갖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오늘날 신학생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밤낮을 기도와 희생으로 살아가며 부디 아들이 성인 사제가 되기를 염원하듯 최경환 성인은 아들 양업을 위한 끝없는 기도의 삶을 살았고, 마침내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는 청양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대가 높은 편이다. 

청양읍에서 대천에 이르는 서쪽으로 포장도로를 가다 보면 화성면이 나오고, 면 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이 탄생한 당시 홍주(洪州) 다락골이 나온다. 36번 국도에서 다락골 줄 무덤 입구까지는 순례자들이 찾기 쉽도록 잘 포장돼 있는 양업로가 뻗어 있다. 양업로를 따라가다 보면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가 눈에 들어온다.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줬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최양업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에는 박물관 겸 소성당이 들어섰다.

사실 다락골 새터와 줄 무덤을 분리해 검토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기록을 보면 다락골이 처음에 주목받은 곳은 새터였다. 그 과정에서 무명 순교자 줄 무덤도 주목을 받게 됐다. 1827년경 집안이 좀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날 때까지 다락골은 미래의 성인과 사제, 순교자들을 길러낸 터전이었다.
 

청양 다락골성지 줄무덤 입구 표지석.
청양 다락골성지 줄무덤 입구 표지석.
청양 다락골성지 줄무덤 10기.
청양 다락골성지 줄무덤 10기.
청양 다락골성지 중무덤.
청양 다락골성지 중무덤.
청양 다락골성지.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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