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세월, 4대째 전통방식으로 빚는 자긍심과 옛 시설 잘 보존돼
이원양조장, 일제강점기 1930년대 출발한 역사·전통 간직한 술도가
1970~1980년대 직원만 20~30여 명, 하루에 3000병 막걸리 팔았다
이원양조장 막걸리, 감미료 첨가 않고 쌀·밀가루 혼합 전통방식 생산
한국인의 밥상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요즘이야 된장, 고추장, 간장은 물론 김치도 사 먹는 세상이 됐으니, 집집마다 달랐던 그 맛은 이제 지난 세대의 추억이 됐다. 하지만 장과 김치만큼이나 우리 민족이 사랑하고 즐겼던 ‘술’도 집집마다 다른 맛이 있었다. 집에서 직접 담그는 ‘가양주’는 지역에 따라, 가문에 따라, 빚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랐고 ‘명가명주(名家銘酒; 이름 있는 집안에 맛있는 술이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문의 자랑이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일본과 중국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로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아온 우리 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본격적인 쇠퇴기에 들어선다. 1916년 일제가 주세법을 공포, 가양주를 불법으로 간주해 단속하고 양조장을 통폐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식량 부족을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 주류 생산을 제한했고,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증류식 소주까지 금지되기에 이른다.
막걸리 제조 원료로 쌀 대신 수입 밀가루를 쓰고, 증류식 소주 대신 에틸알코올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등장한 것이 이때다. 가양주의 실종과 희석식 소주의 등장은 우리 술을 획일적으로 바꿔놓았다. 1970~80년대 산업화와 함께 저렴한 희석식 소주는 한국의 대중주가 됐지만, 그만큼 우리 술의 품질이 저하된 시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가양주가 금지된 이후 ‘집에서 술을 빚어 먹는 것’은 오랫동안 ‘불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즈음 일본에서 막걸리 유행이 이어지고, 2009년엔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전통주를 빚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인식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국순당, 서울탁주 등 기존 양조기업의 세도 함께 커진다.
하지만 전통주에 대한 관심과 막걸리 시장의 확대가 지역 소규모 양조장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캔 막걸리 제품이 나오는가 하면, 한때 편의점 주류 매출 상위권 순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막걸리 열풍은 지역 양조장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1인 또는 가족 경영 형태의 영세사업장이다 보니 막걸리 상품 개발이나 판로 확대가 쉽지 않던 것이다. 특히 농촌 인구의 감소와 함께 ‘농주’인 ‘막걸리’도 들판에서 하나, 둘 모습을 감추면서 지역 양조장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곳, 현재 운영자가 사라지면 문을 닫고 마는 옛 문화의 상징이 됐다.

■ 100년 세월, 4대째 잇는 이원양조장
충북 옥천지역의 양조장 역시 비슷한 쇠퇴기를 맞았고, 또 지났다. 예전에는 면마다 최소 하나씩, 읍에는 10여 개에 달하는 양조장이 있었다지만 경영의 어려움 등으로 문을 닫거나 다른 면의 양조장과 통폐합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옥천지역도 마찬가지여서, 안남양조장은 군북양조장으로(군북안남 탁주공동제조장), 군서양조장은 옥천양조장으로(옥천동서 탁주공동제조장) 통합이 됐다. 양조장 폐업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청성면 산계리에 있던 청성양조장이 문을 닫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남아있는 옥천지역의 양조장은 △군북양조장 △옥천양조장 △이원양조장 △안내양조장 등 4곳으로 대를 잇는 양조장은 군북양조장과 이원양조장 두 곳만 남아있다.
충북 옥천의 금강 변에 자리 잡은 이원양조장은 100년 세월과 전통을 켜켜이 쌓으면서 ‘향수’와 ‘시인의 마을’ 그리고 우리 쌀과 밀가루를 혼합해서 생산하는 대표막걸리 ‘아이원생막걸리’를 빚고 있는 양조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향수’는 시인 정지용이 유학 시절 고향인 충북 옥천을 그리워하며 노래한 시다. 누구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옥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술을 빚는 강 대표가 우리 쌀 100%로 정성스레 빚는 ‘시인의 마을’과 우리 밀 100%로 빗은 ‘향수’는 독특한 맛과 풍미를 가지고 있는 막걸리다.
‘향수’와 ‘시인의 마을’은 알콜 도수 9도로 일반 막걸리 6도보다는 조금 세기에 많이 마시면 금방 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특히 ‘향수’ 막걸리는 우리 밀에 막걸리 누룩(금강 밀)과 입국(우리 밀, 조제종국)만을 이용해 만들기에 우리 밀의 진한 맛과 향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냉장 보관 시에는 40일간 보관할 수 있어 유통기간도 생각보다 오래간다고 한다. 막걸리 용기도 다른 막걸리와 달리 플라스틱이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서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주고 신선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원양조장에서 만드는 막걸리는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우리 쌀과 밀가루를 혼합해 전통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100년 가까운 세월, 4대째 전통방식으로 빚는 막걸리만을 고집하는 자긍심과 함께 옛 시설이 잘 보존돼 있어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양조장이다. 꽤 넓은 부지에 자리 잡은 양조장은 예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2300㎡의 터에 600㎡ 크기로 들어선 양조장 건물에는 1949년 건축한 사입실, 누룩방, 입국방, 체험장, 식음장 등이 보존돼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 ‘좋은 물 있는 곳에 양조장 들어선다’
예부터 좋은 물이 있는 곳에 양조장이 들어선다고 했다.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이원양조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금강 변에서 출발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술도가다. 금강 변의 잦은 홍수로 1949년 수해를 입고, 현재 위치인 이원면 강청리로 자리를 옮겨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양조장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1950년 6·25 한국전쟁의 아픔과 1960년대 4·19와 5·16 등 굵직한 근현대사의 통증을 함께 나누며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술도가다. 증조부(강재선)에게서 시작돼 할아버지(강문회), 아버지(강영철)의 뒤를 이어 막걸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지금의 강현준 대표까지 100년 세월 역사와 전통을 잇고 있는 양조장이다. 한창 잘 나가던 1970~1980년대에는 직원만도 20~30명이 됐으며, 하루에 3000병의 막걸리를 팔았던, 지역과 마을의 대표 양조장이었다.
덕분에 가양주가 금지되면서 상업 주조가 본격화한 일제강점기 근대식 주조장의 초기 모습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스러운 간판과 철제 대문을 지나 양조장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옹기로 입구를 둘러싼 우물과 펌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두밥을 찌기 위해 쌀을 불리고 씻었던 대형 수조와 고두밥을 펼쳐 식혔던 커다란 냉각조가 모습을 보인다.
또 전통 누룩과 입국을 직접 빚어 띄웠던 국방과 40여 개의 항아리가 늘어서 있던 발효실도 규모가 상당하다. 허름하긴 하지만 남아있는 외형만으로도 잘 나가던 ‘이원양조장’의 그 시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전에 술을 빚던 곳인 ‘술방’은 지금은 전시공간과 시음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벽면에는 100년 세월, 술도가의 역사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다. 한 청년이 소달구지에 막걸리 통을 싣고 배달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한편 비닐로 제조된 막걸리병, 갈색 유리 막걸리병 등 선반에 전시된 다양한 병들이 막걸리병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달구지나 자전거에 실려 배달되던 커다란 막걸리 통, 막걸리 통에 ‘이원’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던 낙인, 전성기였던 1986년 양조장 홍보용으로 배포했던 달력 등도 시선을 잡는다.
술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쌀과 누룩, 그리고 물이 그것이란다. 예로부터 ‘좋은 물이 있는 곳에 양조장이 들어선다’라는 말처럼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기 이전인 1930년대 금강 변에서 시작한 이원양조장은 당시 술맛이 일품이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대규모 양조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강현준 사장의 증조부인 1대 강재선 사장은 1930년 이원면 대흥리에 이원양조장을 최초로 세웠다. 1936년 할아버지인 2대 강문회 사장이 이었고, 1949년 수해를 입어 현재의 강청리로 이사해 아버지인 3대 강영철 사장이 전통과 맥을 이어오다가 지난 2017년부터 강현준 사장이 가업을 이으며 4대째 대표가 됐다는 설명이다.
강현준 대표는 “아버지가 노환으로 양조장을 할 수 없게 되자 원래 해오던 건설업을 접고 귀향해 가업을 이어받았다”고 전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앎)’의 자세로 명주를 빚기 위해 전통과 역사, 가업을 잇는 강 대표의 열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마도 술을 빚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제일가는 명주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게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