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포(內浦) 지역은 지금의 ‘충청남도 서북부쪽 가야산 일대의 10개 고을을 지칭한다’고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기록하고 있다. 충남 서북부 지역인 태안, 서산, 당진, 홍주, 예산, 덕산, 결성, 해미, 신창, 면천이 여기에 해당한다. 내포는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숙이 드나드는 감조하천(感潮河川; 강어귀 또는 하천의 하류에서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강물의 염분, 수위, 속도 따위가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하천)의 영향권을 뜻하는 일반명사였으나 이것이 한쪽으로 바다와 만나고 다른 한쪽으로 평야가 넓어 살기 좋은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탈바꿈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아산, 온양, 신창, 예산, 대흥, 면천, 당진, 덕산, 해미, 홍주를 상부 내포라 하고, 태안, 서산, 결성, 보령, 청양, 남포, 비인, 서천, 한산, 홍산을 하부 내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종 12년(1861) 베르뇌 주교가 조선교회를 8개 본당으로 나누면서 다블뤼 주교가 상부 내포, 랑드르 신부가 하부 내포 전교를 맡도록 한 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 지역에서 천주교가 번성한 이유를 학계에서는 ‘바다와 평야를 끼고 있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내포는 각종 물산이 모이는 지리적 이점으로 상업 기능 또한 발달했다. 재산을 축적하는 양인이 늘었고, 외지인과의 접촉도 잦아짐에 따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높아졌다. 그럴수록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친 천주교 교리가 마음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천주교회사는 내포교회의 발상지로 예산 신암면의 ‘여사울 성지’를 지목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훗날 ‘내포의 사도’로 떠오른 이존창(1752~1801)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존창은 정약종 등과 함께 체포돼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는데, 이웃 당진 출신의 우리나라 첫 신부인 김대건의 할머니는 이존창의 조카 딸이다.

■ 부여 도앙골성지…이존창 전교 활동
도앙골은 성지는 충남 부여, 보령, 서천의 3개 시군이 맛닿은 월명산 아래 깊은 계곡 안에 있는 마을이다.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은 오래전부터 도앙골이라고 일컬어 왔으며,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사적지로 이존창 루도비코의 전교 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도앙골’은 이 마을의 계곡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고 해 생긴 ‘도원곡(桃園谷)’에서 유래했다고도 전해진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49년 말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 여섯 달 동안 충청·전라·경상·경기·강원 등 전국 5개 도를 돌면서 성사를 베풀었다. 무려 5000리(2만㎞)길을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한 최양업은 충남 부여 도앙골(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에서 7월 한 달 동안 고된 여정을 잠시 쉬었다.
도앙골 교우촌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첫 번째 편지를 쓴 곳이라고 한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해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1850년 10월 1일 최양업 신부는 9개월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을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고했는데 이 편지의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 신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편지에서 도앙골 같은 산골에 사는 신자들과 근처 산골에 사는 신자들은 평야 지대의 신자들보다 훨씬 열심히 산다고 설명하였다. 도앙골과 산 너머 삽티골에서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 때 체포돼 모두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도앙골에 살던 오 요한,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시몬 등이 체포돼 공주에서 치명했다. 또한, 같은 해 도앙골에 살던 김순장 요한은 서짓골 신자들과 함께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다블뤼 성인 등 4위의 유해를 수습해 서짓골에 안장하기도 했다. 1890년에 도앙골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 공소를 형성했지만 1970년 공소가 폐쇄됐다. 하지만 2011년 9월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주례로 ‘기도의 집’ 축복식을 봉헌하고, 같은 해 12월 22일 전임 교구장인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성 기원비 옆에는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을 기념하는 제대를 만들어 봉헌했다. 또한 도앙골 성지 옆에는 삽티 성지가 있어, 두 곳을 잇는 도보 순례길이 조성돼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신앙을 위해 산속에 숨어 어려운 삶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과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안타까움을 지녔던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묵상해 보기에 더없이 좋은 성지라고 ‘대전주보’에 기록하고 있다.

■ 부여 삽티성지와 황석두 루카 성인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의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 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다. 삽티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홍산으로 피신해 선교 활동을 한 시절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서 배척받은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살았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 선교사 페롱 신부를 보필하면서, 가끔 삽티에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했다고 한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했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해 삽티에 안장했다.
하지만 1866년 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 관아에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돼 무참히 처형을 당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됐다. 1922년 시복 조사 재판에서 72세의 나이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는 “병인년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증언했다고 전해진다.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삽티의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 묘를 찾아 돌보거나 옮긴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을 하던 중에 스러진 묘터에 묻혀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가상과 성모상, 묵주 등 성물이 발굴됐다고 한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고 신빙했다. 하지만 그 안장 신빙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 묘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2012년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했다. 2016년 조성된 삽티성지에는 성인 안장지와 안장기념정원, 성 루카 황석두 기념경당 등이 있다. 성 루카 황석두 기념경당은 ‘성석당(聖石堂)’이라고 했고, 성석당 뒤쪽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성당 왼쪽 길을 따라 오르면 황석두 성인 안장 묘원, 기념비 안내표지,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야외제대가 조성돼 있는 ‘황석원(黃錫園)’이 건립돼 있다. 제대 뒤의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와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야외 제대 뒤쪽에는 높다란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돼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한편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손선지(1820~1866, 베드로)의 고향이며, 정문호(1801~1866, 바르톨로메오)도 임천 출생이었다. 당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정문호는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해 살고 있던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함께 정착해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담배 상인으로 가장한 포졸들에게 잡혀 성인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 또는 베드로)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여 지석리 성지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임천 괴인돌 출생의 손선지 베드로와 임천 출생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두 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시성비가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 때 혹독한 고문 속에 순교한 이들을 위해 비신자인 손선지 종씨들이 기증한 밭에 시성비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부여를 중심으로 충남 서부지역(하내포지방)에 산재해 있는 도앙골 성지, 삽티 성지, 지석리 성지, 산막골 성지, 불무골 교우촌, 서짓골 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원 성지는 도랑골성지, 산막골 성지, 불무골 교우촌 등이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성지화 사업은 기존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천주교적 해석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을 보이는 과정에서 다른 종교나 문화의 가치가 소외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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