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순교성지, 내포의 중심 ‘홍주관아’ 적신 순교자의 핏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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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순교성지, 내포의 중심 ‘홍주관아’ 적신 순교자의 핏빛
  • 취재단=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학생기자단
  • 승인 2024.11.0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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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랑지를 가다〈14〉
홍주순교성지공원에 세워진 천주교홍주순교성지비와 생매장순교터.
홍주순교성지공원에 세워진 천주교홍주순교성지비와 생매장순교터.

조선 시대 충청도 서북부 내포 지역에 위치한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은 지역 방어와 행정의 중심지였기에 정3품 목사(牧使)를 두고 5군 22현을 관할 했다. 한때는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하기도 했으며, 충청도 동북부(지금의 충북)의 청주, 서남부의 공주와 더불어 충청도를 삼분할 정도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에까지 이르렀다. 충청도 중에서도 양반세가 강하면서도 굳은 충절의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이 많이 태어나 나라가 위태롭고, 잘못될 때는 이를 바로 잡으려는 기질이 강했던 고을이었다.

홍성은 충남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당시 홍주는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홍주는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결성과 합해 홍성이 돼 행정구역 상 홍주라는 지명은 현재는 없는 상황에서 고유지명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고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나 다름없다. 홍주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됐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 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북문교 건너 월계천 변 참수 터, 생매장터로 사용됐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곳이다.

홍성은 예로부터 고려 시대의 최영 장군을 비롯해 조선 시대에는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 선생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들의 충절의 정신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을 중심으로 쌓은 최장 1772m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구간은 810m 규모로 최초의 축성 연도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거쳤으며, 성내에 35개 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양문(朝陽門)과 2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축된 홍주목 관아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홍주아문(洪州衙門), 여하정(余何亭) 등이다. 1870년 흥선대원군이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등의 현판을 사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주성 유적지는 1972년 사적 제231호로 지정됐다.
 

홍주성 북문교 인근 월계천변의 홍주순교성지 참수터.
홍주성 북문교 인근 월계천변의 홍주순교성지 참수터.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홍주아문을 들어서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홍주 목사가 머물던 동헌 안회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당했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당시 홍주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시복시성이 추진돼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중기 박해(1812~1839년) 때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주의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순교자들까지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순교록에 의하면 홍주의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많은 순교자가 홍주성에서 처형된 후 그 시체는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고 전해진다. 홍주성벽 위에서 신앙의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디찬 시체가 돼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다.

또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해 서울 종로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는 홍성에서도 발견된다. 척화비는 홍성읍에서 차를 타고 서산 방면으로 15분가량 달리면 구항면사무소 건너편 산자락 밑 바위에 서 있다. 산허리를 돌아 나오는 세찬 세월의 바람에 척화비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당시의 서슬 퍼런 박해의 기억과 굳은 신앙을 아직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지난 2004년 홍성 본당과 홍성군에 의해 지역 천주교 순교사가 공론화되면서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2008년 3월에는 홍주의사총 옆 합수머리에 홍주순교성지 공원 터에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비를 세우고 성역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홍주순교성지 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홍주순교성지 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라 썼고,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순교비 옆 표지석에는 ‘이곳은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고 있다. 이곳 홍주순교성지 공원에는 십자가의 길을 비롯해 순례객들이 언제든 찾아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곳이다.
 

■충청도 첫 순교 터 ‘홍주성지’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홍주성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순교 터였던 홍주 감옥을 2012년 복원했다. 홍주 감옥은 기록으로 확인된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가장 많은 113명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교수형이 시행됐고, 굶주림과 목마름, 심한 매질로 인한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비참한 옥중생활을 하다가 옥사한 이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우물 또한 복원됐다. 이곳은 또한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탕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해 머물던 곳이고, 성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메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카까지 모두 6명의 성인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충청도의 첫 순교 터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의 신분으로 옥에 갇혀 옥중 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창 베드로는 1792년 추운 겨울 얼고 있는 몸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이곳은 충청도의 첫 순교 터가 됐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6곳의 순교 터가 있는데, △홍주 관아의 동헌 △홍주 관아의 감옥 터 △조양문 앞, 진영장이 머물렀던 진영 관아 △조리돌림을 했던 옛 저잣거리 △홍주성 북문교 건너 월계천변 참수 터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생매장 터 등 6곳을 도보 순례할 수 있는 순교성지로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순교자들의 신앙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걸을 수 있는 순례길이 잘 조성돼 있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예비신자들의 모범성지, 천주님을 알고 수년동안 예비신자들을 입교시키며 자신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옥중 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면서도 순교 직전 자기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 이들이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기차 순례가 가능한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홍성역에서 홍주순교성지까지는 도보로 30분 이내의 거리로 많은 인원이 열차로 순례할 수 있는 성지요,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기도와 묵상으로 순교 선열들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기차 순례지로 꼽히는 순교성지이다. 이렇듯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는 홍주 관아가 있었던 홍주읍성을 시작으로 주변 곳곳에 성지가 흩어져 있어 관아의 고목과 무심하게 흐르는 월계천·홍성천이 증인이 돼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대표적인 순교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홍주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져 많은 교우들이 신앙을 지켰던 곳이었다. 홍주에 인접한 북쪽 지역인 삽교천 부근 당진, 해미, 예산, 아산 지역 등에 많은 교우촌이 밀집돼 있음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끝>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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