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이주민센터-이주여성한국어학당의 한국어교사들은, 지난 2월24일부터 3월6일까지 캄보디아 연수를 다녀왔다. 캄보디아에서 홍성으로 시집온 소페아와 동행하여 캄보디아 문화유적 탐방과 소페아, 모태이, 찬사룬의 친정집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연수를 통해, 참가자 모두 홍성과 캄보디아가 가까운 이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대상이 친구로 변하는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홍성지역사회가 아름다운 다문화공동체가 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하며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프놈 바켕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일터와 학교로 바삐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캄보디아는 더운 나라여서인지 사람들이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있었다. 앙코르 지역의 최초 신전으로 '바켕'이라는 이름의 산 위에 지어진 프놈 바켕. 붉고 고운 흙먼지가 날리는 지그재그 산길을 4살 대성이를 안고 오르는 힘든 소페아를 위해 우리 선생님이 번갈아 아이를 안아주셨다. 앙코르 사원 중 가장 많은 탑이 있는 곳이지만 아주 오래전(889~910년)에 지어진 데다 더운 날씨에 산꼭대기에 있으니 훼손이 많아 여기저기 복원 중이어서 지금은 어떤 형태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지만 신전에 올라 사방이 뚫린 중앙 성소에서 산 밑을 바라보니 역시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산 아래에서 차양모자를 파는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유창한 우리말로 "일달러! 일달러!"를 외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도착한 곳은 바로 앙코르와트. 1113년부터 1150년, 앙코르 왕국의 최전성기에 지어져 캄보디아 국기 한가운데에 하얀 색으로 등장하고,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이유인 바로 그곳. 캄보디아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크메르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로지 돌로만 만든 위대한 힌두사원이자 불교사원이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기나긴 나가(머리가 일곱 개 달린 뱀의 형상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함) 다리를 걸어 탑문인 고프라를 통과하면 다시 길고 긴 내부진입로가 보인다. 그러니까 앙코르 와트는 인공 저수지인 해자에 둘러싸인 거대한 인공 섬인 셈이다.
중간 중간에 나무 기둥의 윗부분이 뾰족뾰족해서 아픈 역사를 가진 슈가팜나무만 있을 뿐 그늘이 거의 없어서 한낮 뙤약볕 아래를 걸어야 했던 우리는 중앙 신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버렸다. 그래서일까? 진입로 중간쯤에 좌우 대칭으로 똑같이 생긴 건물을 지어 사람들이 들러볼 수 있게 한 것은. 도서관인 이 건물 옆에는 각각 연못이 있는데 앙코르의 탑이 반사되어 신비한 느낌의 사진을 찍을 수 있기로 유명한 일명 포토 존이다. 우리도 이 연못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으며 잠깐 쉬었다.

■ 크메르왕국이 남긴 찬란한 유산
나는 대체 무엇을 믿고 이곳이 한적하리라 예상했을까.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던 회랑과 3층 성소에서 캄보디아 현지인 관광객을 보지 못한 씁쓸함에 온갖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건축물을 둘러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곳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역시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일본의 옛 수도 교토의 여러 사찰들을 여행하며 보았던 현지인 관광객의 여유로움과 오버랩되면서 괜히 슬퍼졌다. 외국인은 20불짜리 티켓을 사야하지만 현지인은 무료여서 입장료를 내지도 않는데 간혹 보이는 현지인이라고는 압사라 부조벽화를 복원하려고 스캔중이거나, 러시아나 한국에서 온 단체관광객을 돕고 있는 가이드일 뿐.
그래서 '이곳에 온 느낌이 어때요?' 라고 소페아에게 묻기도 미안했다. 소페아는 미소 지으며 그냥 '좋아요'라고 짧은 소감을 말했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내가 다 알 수 있을까? 위대한 크메르 문명의 거대한 유산 앞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리러니라면 아이러니일 테니 말이다. 나에게는 낯설기만 한 힌두신화를 캄보디아 사람들은 과연 다 알고 있을까 궁금해서 소페아에게 물어봤더니 역시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학교에 다닐 만한 형편이 못되니 이것도 안타깝기만 했다.

앙코르 유적은 사전지식이 없이 3시간만 보고 나면 그냥 큰 돌덩이들일 뿐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전지식이 전무한 내가 본 앙코르의 모든 유적은 그저 놀라움이었다. 실제로는 보지 못했던 부처의 얼굴들이 집으로 돌아와 들여다 본 사진 속 탑문에 여기저기 숨어있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던 바욘 사원, 너무 자란 나무뿌리 때문에 무너져 가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타프롬 사원까지… 나무 한 조각 쓰지 않고 그냥 다 돌. 나르기도 쌓기도 어려웠을 커다란 돌에 새겨 넣은 수없이 많은 신화와 압사라 또는 부처의 얼굴들. 다 살펴보지 못했지만 표정이 같은 압사라가 없을 정도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화려한 색을 입히지 않아서 더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다만 찌는 듯한 더위가 그 감동을 조금 빼앗아 갔을 뿐.
힘들게 살아가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앙코르의 모든 유적들에게서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그들을 떠올렸다. 돌아가면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마음껏 자랑해도 모자라니 할 수 있는 만큼씩은 최대한 이 유산을 자랑하고 다니라고 말할 거라고 다짐했던 순간이 많았다. 물론 소페아에게도, 엄마가 크메르 사람인 우리 대성이에게도. 아마 우리 선생님들도 같은 마음이 아니셨을까.
소페아는 이번에 남편과 함께 친정에 오면서 가족 모두 앙코르를 여행할 계획을 세웠었는데 잘 안되어서 몇 년 후에 돈을 많이 모아 다시 올 거라고 했다. 우리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게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 캄보디아 집단 학살 수용소 뚜어 슬랭
마지막 여행지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씨엠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전체적으로 잘 정돈되어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의 현장, 뚜어 슬랭이 있다. 원래 여학교였던 이곳은 급진공산주의자 폴 포트가 정권을 장악했던 1975년에서 1979년까지 민주 캄푸치아로 국호를 바꾼 후 사회 인적 구조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4년 동안 전 국민의 3분의 1정도인 200만 명을 고문하고 처형한 곳이다. 고문 도구, 고문 방법, 해당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규칙들, 좁디좁은 독방, 처형당하기 전 찍은 사진들과 죽은 사람들의 유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 우리는 다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말로만 듣던 동족의 처참한 학살현장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소페아가 울면서 뒤돌아섰기 때문에 각자 흩어져 따로 따로 보고 나왔다. 안경을 썼다거나 손이 예쁘다거나 선생이라는 이유로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압사라 춤을 추는 사람들도 처형했기 때문에 전통의 맥이 끊기고, 총알이 아까워 어린 아이들은 슈가팜나무의 뾰족한 기둥에 던져 죽이기도 했다는데 마음이 아파 눈물을 쏟으며 둘러보았던 곳. 까마득한 옛날 일이 아니라 최근 40년 전에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도 참 비현실적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어딜 가나 현지인들은 우리 소페아에게 말을 걸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아들 대성이를 안아보기도 했다. 한 묶음으로 같이 다니는데도 소페아를 한눈에 알아보는 그 사람들이 나는 더 신기했다. 내 눈에 소페아는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데도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유적지나 관광지를 다니면서도 캄보디아라는 나라, 캄보디아 사람, 캄보디아 여성들이 결혼해 살고 있는 우리나라를 계속 생각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캄보디아와 태국의 관계도 저절로 알게 되어 이해의 폭이 넓어져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이제 우리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너무 무식한 선생이어서 미안했어요.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배울 테니 우리, 더 잘 지내요.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