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면 성호리 후청동마을

충남 12개 시·군 등 소멸위험지역, 인구감소 문제 홍성도 예외는 아니야
홍성군 인구 10만 명 돌파,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인구 유입에 따른 결과
홍성읍 신성리, 장곡면 죽전리 등 8개 마을은 인구 100명도 무너진 마을
홍성 가장 작은마을, 결성 용호리 평산·덕우, 교항리 용동, 성호리 후청동
지방소멸과 인구감소 담론이 우리 사회를 강타한 지도 수년이 흘러가고 있다. 지방소멸 담론은 지방인구감소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역할을 했으나, 한편으론 과도한 공포감을 키우는 요인로 작동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지방소멸. 지방의 인구감소문제가 부각되면서 심심찮게 듣는 용어다. 이 용어는 ‘지방소멸위기론’이 학계를 통해 등장한 후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돼 사용되고 있다. 지방소멸 담론은 지방 지역 인구감소 문제의 심각성을 공론화하고 정책적 대응을 가속화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 ‘지방소멸’ 공포에만 짓눌린 현재의 담론에서 나아가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소멸위험지수는 한 지역의 20~39세 가임기 여성 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값으로 산출된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전국 228개 시·군·구 중 소멸위험 시·군·구는 118곳으로 집계됐다. 소멸위험지수로 산출된 소멸위험지역은 최근 몇 년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6년 7월 집계 당시 84곳이었던 소멸위험지역은 118곳으로 불어났다. 충남(80.0%)도 지역 내 12곳의 시·군 등 상당수가 소멸위험지역으로 집계됐다. 소멸위험지역은 인구 유입 등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30여 년 뒤에는 소멸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러한 충격적인 가정은 ‘지방소멸’라는 용어로 대표되면서 점차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 홍주군 ‘홍’자와 결성군 ‘성’자 따 ‘홍성군’
지방소멸과 인구감소 문제는 홍성도 예외가 아니다. 홍성군 인구가 10만 명(10만 108명)을 넘긴 것은 순전히 내포신도시 인구 유입에 따른 결과다. 하지만 홍성읍 신성리 88명을 비롯해 금마면 송강리 66명, 장곡면 죽전리 68명, 서부면 양곡리 84명, 죽도리 55명, 갈산면 갈오리 46명, 대사리 93명, 구항면 대정리 62명으로 마을인구 100명이 무너졌다.
홍성의 옛 지명은 ‘홍주(洪州)’다. 고려 현종 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 가까이 홍주(洪州)였다. 전성기 시절의 홍주는 아산, 온양을 비롯해 차령산맥 이북 충청우도 지역을 모조리 거느렸다. 홍주(洪州)는 경기 평택에서 충남 서천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20여 개 군·현을 다스리는 행정의 중심이었다. 땅이 어찌나 넓었던지 당시는 그냥 ‘홍주(洪州)’가 아니라 ‘대홍주(大洪州)’라 불렸던 고을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홍주(洪州)’란 이름을 지우고 지금의 지명인 ‘홍성(洪城)’을 만들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통합하고 이 과정에서 홍주의 ‘홍(洪)’자에다 결성의 ‘성(城)’자를 합해 ‘홍성(洪城)’이란 새로운 지명을 강제로 만들었다. 그 구실을 일제는 목사고을 홍주(洪州)와 공주(公州)의 일본어 발음이 둘 다 ‘고우슈우’로 같아 행정적 불편을 초래한다는 개명의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진짜 이유는, 이 지역의 지명도를 낮추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 ‘홍주(洪州)’라는 지역의 저변에는 뿌리 깊은 항일정신과 활발한 의병 활동,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던 이 지역의 땅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지명도를 낮추고 기운을 없애려 했다는 것이 정설인 듯싶다.
홍성은 ‘홍주’란 옛 고유지명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여러 가지 행정적 관심으로부터 한계에 부딪혀 있다. 특히 충남도청 내포신도시로 충남도청 등 충남의 행정기관이 이전해 오면서 더욱 한계를 겪고 있다. 홍성이 사실상 충남도청소재지가 되면서 이런 목소리는 더 높아졌지만 행정에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는 형국이다. 홍주 지명을 되찾는다는 건 한때 ‘내포(內浦·내륙의 포구) 지방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번영을 이뤘던 지역의 정체성과 옛 홍주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다. 땅 이름이야말로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이니까 말이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충남도청소재지인 내포신도시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명을 바꾸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1000년의 홍주 역사와 과거의 영광도 있지만, 100년 홍성의 실재(實在)도 엄연하게 존재하는 현실에서 ‘충남도청소재지 홍성’을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행정에서는 바꾸는 게 옳은 건지, 바꾸지 않는 게 맞는 건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듯 ‘홍성(洪城)’이란 이름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결성(結城)’은 본래 백제 결기현(結己縣)이었다. 660년에 백제가 수도 사비가 함락되는 심각한 타격을 당할 때 웅진도독부 예하가 됐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를 몰아내며 복구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결성군(潔城郡)으로 고치고 신읍(新邑)·신량(新良) 등을 거느렸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운주(運州)에 속했고,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면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결성(結城)으로 한자가 변경됐다. 1413년(태종 13) 현감을 뒀으며, 1733년(영조 9)에 보령(保寧)에 속했다가 1736년 복구, 결성현(結城縣)이 됐다. 1895년(고종 32) 홍주부 결성군, 1896년 충청남도 결성군이 됐으며,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부군면 통폐합 개편으로 ‘홍주군’에 편입됐다.
옛 결성현 고을이던 결성군 10개면 지역은 5개 면으로 개편했다. 본래 결성군지역이 일제강점기인 1914년 6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10개 면이 결성, 은하, 서부, 광천, 구항등 5개 면으로 축소 개편했다. 결성면은 본래 결성군의 읍내가 되므로 현내면(懸內面)이라고 해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용천면(龍川面=古等山, 高等, 西北古等山, 龍川山面등 칭함) 16개 리와 가산면의 목현리 일부, 화산면의 장양리, 가정리의 일부, 홍주군 고남하도면의 산직리를 병합해 ‘용천면’이라 하고 홍성군에 편입했다. 교항, 금곡, 무량, 성곡, 성남, 성호, 와리, 용호, 읍내, 중리, 형산리 등 11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17년 면명 변경에 따라 결성군의 이름을 따서 결성면이라 했다. 현재는 관할 리가 9개 리로 교항, 금곡, 무량, 성곡, 성남, 성호, 용호, 읍내, 형산리 등이다.
■ 결성면·홍성군에서 가장 인구 적은 ‘후청동’마을
결성면 성호리는 본래 결성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앞에 호수가 별 모양을 하고 있어 ‘성호리(星湖里)’라 했다. 성호리는 조선 시대 결성현의 외항이었던 모산만 입구에 위치, ‘돌곶이’이라 불리던 유명한 포구였다. 한때 주민이 300호를 넘어설 정도로 풍요로운 어촌이었다. 이후 홍성과 보령을 잇는 홍보방조제와 간척사업 등으로 인해 어촌 사람들이 사라지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로 변모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동 일부와 현내면의 교촌 난정리, 가곡리, 후청리, 피촌을 병합해 홍성군 용천(결성)면에 편입했다. 이곳 배머리 옆 나정에는 일명 ‘관해정’이 있는데, 유학의 대가인 한원진(남당)과 김시철(치암), 윤봉구(병계)가 시문과 이기학을 강론한 곳으로 유명하다.
결성면의 지난 5월 기준 인구는 1918명(1123세대)으로 홍성군에서 유일하게 2000명이 무너졌다. 결성 면 성호리는 3개의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성호1리는 후청동마을, 성호2리는 가곡마을, 성호3리는 원성호마을에 해당한다. 홍성군에서 가장 가구 수가 적은 마을은 현재 결성면 성호리 후청동마을이다. 2000년대 이후부터 결성면에서 인구수가 적은 마을로 손꼽히는 4개 마을이 있었다. 결성면 용호리 평산마을과 덕우마을, 교항리 용동마을, 성호리 후청동마을이 그곳이다.
적은 가구 수로 엎치락뒤치락하던 마을들이었지만, 2025년 5월 현재 후청동마을이 가구 수와 인구가 가장 적은 마을이 됐다. 후청동마을은 동쪽으로 무량리 역촌마을과 읍내리 교촌마을, 서쪽으로 성호리 원성호마을, 남쪽으로 성호리 가곡마을, 북쪽으로 서부면 판교리 묵동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후청동마을 고중섭 이장은 “후청동마을은 규모가 작아 반 구분 없이 운영되고 있다”며 “과거에는 마을회관과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을 ‘수청굴’, 혹은 ‘수청골’, ‘후청굴’이라 하고, 마을 북쪽에 안산과 청룡산 사이 고랑을 ‘봉골’, 혹은 ‘봉굴’이라 불렀다. 수청굴과 봉골을 구분해 불렀지만, 반을 구분해 반장을 따로 두거나, 마을 활동을 따로 하지 않고 통합해 운영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 이장은 “마을이 가장 번성했던 1960~1970년대 무렵에는 성호리에 300여 가구가 거주했다. 후청동마을도 2004년에는 28가구 64명, 2015년에는 21가구 42명이 거주하기도 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은(2025년 5월 기준) 19가구에 35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60~70대의 고령자이며, 85세 이상도 3명이 있다. 귀농 가구는 4가구에 5명”이라면서 “후청동마을은 과거부터 특수작물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주를 이뤘다. 소수의 가구(3~4가구)가 고추, 배추, 무, 오이, 수박, 호박 등의 채종을 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 무렵 옆 마을인 가곡마을의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는 부녀자들이 가곡마을까지 펼쳐진 갯벌에서 황발이나 능쟁이 등을 채집해 반찬거리로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고령화로 인해 인구가 감소해 결성면뿐만 아니라 홍성군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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