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도 억압받는 민중 구제를” 불교 사회화·대중화 외쳤다
상태바
“불교도 억압받는 민중 구제를” 불교 사회화·대중화 외쳤다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1.23 1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해 한용운 서거 70주기 ④ 종교활동

 

▲ 만해 한용운이 생전에 기도도량으로 자주 이용하던 오세암.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종교인으로서 한용운은 기존 불교가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어 일제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는 민중을 구제하고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만해가 불교계에 입문한 것은 29세이던 1907년이다. 만해는 당시 고향 홍성을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백담사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백담사에서 스승인 김연곡에 의해 계를 받는다.
30세인 1908년에는 강원도 유점사에서 화엄경을 수료하고 이듬해에는 강원도 표훈사에서 불교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만해는 송광사, 범어사, 통도사 등 권위 있는 사찰을 두루 거쳤고 36세 되던 1914년에는 불교강구회 총재에 취임하고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펴냈다.
또 같은 해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하고 영남, 호남 지방의 사찰을 돌면서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며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1918년까지 오세암에 머물던 만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로는 독립운동에 집중하다가 43세 되던 해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최린, 함태영, 오세창 등과 출옥한 이후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법보회를 발기했다.
같은 해 ‘철창철학’, ‘육바라밀’ 등을 주제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중불교를 기초로 한 독립사상에 대한 강연을 이어나가며 불교대중화와 민족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만해는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했다. 만해는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불교 관련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만해는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혁신론을 주장,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했다. 또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만해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또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했다.
또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의 편찬에 참여하는가 하면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
만해는 민족독립운동, 종교인, 저항시인 등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그는 당시 강렬한 현실비판을 통해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혁명사상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사상은 억압받던 민중을 위해 선봉에 서며 불의에 항거했던 행적과 함께 현재에 길이 전해지고 있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