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② 만해 숨결 살아숨쉬는 백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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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② 만해 숨결 살아숨쉬는 백담사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4.1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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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탈고… 만해마을 만해축전 개최
매년 8월 1만여명 관광객 … 만해상 제정 등 선양 사업 풍성

 

 

 

 

 

▲ 백담사 만해기념관 전경.

 

 


◇백담사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민족의 기개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는 갑오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민중들이 무참히 쓰러져 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 것을 목격한 만해는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라고 판단하고 그의 나이 25세에 홀연 출가를 결심한다.
그의 발길이 처음 다다른 곳은 내설악 백담사였다. 백담사(百潭寺)에 만해 한용운이 도착한 때는 1904년 일제의 검은 손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만해는 내설악의 영봉과 물소리가 마음을 씻는 백담사에 발길을 멈추고 1905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한다.
백담사의 기원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창건한 한계사(寒溪寺)다. 그 뒤 이 절집은 1752년(영조 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백담사는 만해가 수도하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기도 하다.
처음 만해가 백담사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가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세암에서 선(禪)을 닦던 만해는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러시아와 시베리아, 만주 등을 돌아보고 스물일곱 살 때 재입산해 백담사에서 정식 득도했으니 만해에게 설악산과 백담사는 각별한 인연의 땅인 셈이다.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1910)을 저술하기도 하였지만 시인과 독립운동가로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3·1운동의 지도자로서 끝까지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거절한 채 영양실조로 죽어가면서도 생명과 평화의 시심을 노래한 만해 정신의 산실인 셈이다.
◇오세암
만해는 설악의 심장부에 위치해 인연 있는 중생이 아니면 발길이 닿지 못하는 백담사에서 이렇듯 철저한 수련과 정진으로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다.
1915년 백담사가 화재를 만난 이후에는 오세암에서 주로 정진하게 된다. 오세암은 백담사에서 산길을 따라 30리를 오르면 설악의 영봉을 병풍처럼 두룬 연꽃의 형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부속암이다. 당시 오세암에 봉안, 비치된 장경각의 팔만대장경은 불교 경전공부에 매달리던 만해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오세암에서 1917년 12월 3일 밤 좌선 중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이 풀렸다는 오도송(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 一聲喝破三千界 / 雪裡桃花片片飛)을 남겼다.
직역하면 ‘사나이 이르는 곳 그곳이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이가 긴 시름에 잠겼던가/ 크게 한 번 할하여 삼천세계 깨트리니/ 눈 속에 복사꽃이 분분히 나는 구나’라는 뜻이다.
오세암은 만해에게 있어서 종교를 역사화하는 역량을 보인 근대정신의 성스러운 성지가 된 셈이다.

 

 

 

 

 

▲ 백담사 만해마을.

 

 


◇만해기념관
백담사는 만해의 세계관이 수립되고 그의 철학이 잉태되고 성장한 만해 정신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만해’하면 백담사이고 ‘백담사’ 하면 곧 만해를 떠올릴 만큼 깊은 관계가 맺어진 장소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만해의 문향(文香)과 정신도 조금씩 탈색되어 가는 것을 뜻있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7년 당시 오현 스님은 외설악에 있는 신흥사의 주지를 맡았다. 그는 그때부터 설악에서 만해의 자취와 흔적이 점점 지워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1996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고 1997년 11월 9일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을 개관했다.
만해기념관 내에는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원전을 비롯해 ‘세계지리’, ‘영환지략’, ‘음빙실문집’ 등의 책, 한용운의 유묵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을 비롯한 각종 판본, 1962년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구논문 등이 전시돼 있다.
또 만해의 출가와 수행, 3·1 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 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기념관 밖에는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조각된 만해 시비와 만해두상 조각이 있으며 백담사 내에는 만해당, 만해적선당, 만해교육관 등 만해 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97년 만해기념관 개관이후 인제군은 만해선양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7년 ‘만해상’을 제정했고 1999년부터는 백담사에서 조선일보의 후원을 얻어 매년 여름 ‘만해축전’을 개최하면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 백담사 만해마을 문인의 집

 

 


◇만해마을
백담사를 중심으로 인제군이 조성한 만해마을은 만해가 3·1운동의 지도자로서 끝까지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거절한 채 영양실조로 죽어가면서도 생명과 평화의 시심을 노래한 만해 정신의 산실이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암흑시대에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 넣어준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 설립됐다.
만해마을의 정문엔 ‘경절문’(徑截門)이 자리하고 있다. 두 장의 큰 돌판을 기역(ㄱ) 자로 이어붙인 듯한 현대적 감각의 경절문에 들어서면 ‘만해학교’(지상 2층)와 ‘문인의 집’(지상 4층, 지하 1층)이 마주보고 있다.
2003년 지어져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받은 만해마을은 2만1000㎡의 대지에 문인의 집, 만해기념관(박물관), 만해학교(교육시설), 서원보전(법당), 만해수련원, 청소년수련원 등 건물 6개동과 종각, ‘님의 침묵 광장’, 운동장, 잔디밭 등이 들어서 있다.
문인의 집은 200명, 청소년수련원은 5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만해마을은 시가로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채로운 것은 백담사 만해마을에 조성된 건물 안팎의 모든 현판을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과 명사들이 각각 담당했다는 점이다. ‘백담사 만해마을’은 시인 고은씨가, ‘만해학교’는 시인 신경림 씨가, 만해스님이 말년에 기거했던 ‘심우장’은 시인 이근배씨의 작품이다.
만해마을은 매년 8월 만해축전이 열리고 만해상이 시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오현 스님의 주창으로 만해축전이 시작된 것은 1996년이다.
만해축전은 예술제와 학술제를 비롯 백일장, 서예대전, 만해시인학교 등을 통해 문학인과 지역민이 한데 어

 

 

 

▲ 만해문학박물관 앞 만해 동상

우러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만해상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김대중 전 대통령, 리영희 선생, 법륜 스님, 함세웅 신부, 두봉 주교 등 이념과 국경을 넘어선 수상자 선정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부상했다.
만해마을 관계자는 “매년 만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만여명의 방문객이 만해축전 기간 중 백담사 만해마을을 방문하고 있다”며 “만해의 정수가 녹아있는 백담사와 만해축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만해상을 선정하는 등 만해축전이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자체와 불교계가 협력해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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