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내 마음의 길이에는 미치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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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내 마음의 길이에는 미치지 못하리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4.07.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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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28>

마음이 언짢거나 뒤틀린 일이 있으면 혼자서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있다. 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거나 헛발질을 하면서 이른바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지인을 만나 긴 회포를 풀거나 마음에 스치는 교훈적인 말씀 한마디에 큰 위안을 삼는다. 이런 뒤틀린 마음을 풀기 위해 어디엔가 무작정 걷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시인도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마음에 뒤틀린 바를 풀기 위해 지리산 구곡령 고개를 넘으면서 뒤틀린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過九曲嶺(과구곡령) / 만해 한용운

천리 밖 손객 하나 섣달 눈 보내고서
하늘을 닿을 듯한 굽이굽이 구곡령 길
아직도 뒤틀린 내 마음엔 미치지 못했으리.

過盡臘雪千里客 智異山裡趁春陽
과진랍설천리객 지리산리진춘양
去天無尺九曲路 轉回不及我心長
거천무척구곡로 전회불급아심장 

 


뒤틀린 내 마음의 길이에는 미치지 못하리(過九曲嶺)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천리 밖 손객이 섣달 눈을 다 보내고서 / 지리산 깊은 골짝 봄볕에 길을 걸었네 // 하늘에 닿을 듯한 굽이굽이 구곡령 길엔 / 뒤틀린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리]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섣달 눈을 다시 보고 지리산 골짝 봄볕, 하늘 닿은 구곡령길 뒤틀려진 이 마음’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구곡령을 지나며]로 번역된다. 구곡령은 가야산에도 있고, 항해북도 평상군에도 있으며, 지리산 자락에도 있는 고개의 이름이다. 아홉 개의 굽은 고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고개가 많다는 뜻이겠다. 시인은 한 많은 이 고개를 넘고 한 수도를 위한 도행의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험하고, 때로는 가파른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도달한 곳은 어느 사찰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구곡령을 넘었던 시기는 모진 추위가 지나고 골짜기에 눈이 녹으면서 봄볕이 어린양을 부리는 시기였음을 알게 한다. 천리 밖에 내렸던 섣달 눈을 훨훨 날려 다 보내고 나서, 오랫동안 마음으로 다짐했던 지리산 깊은 골짜기의 봄볕이 비치는 길을 걸었다는 시상이다. 수도는 한 곳에서만 머무를 수 없는 것이 고승의 불문율(不文律)이 아니었나 싶다. 화자는 아마 어떤 뒤틀린 심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뭘까?’라는 의문이 든다. 내 조국 내 강토를 목청 높여 외쳤던 선사였기에 조국 잃은 설음에 치미는 그런 심사였음으로 짐작된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고 험한 구곡령 길일지라도 [뒤틀린 내 마음의 길이엔 못 미치리]라는 심회를 담아냈다. 화자의 심사를 누가 어떻게 어루만져드렸나에 대한 강한 의문은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긴다.

<한자어 어구>
過盡: 다 보내다. 臘雪: 섣달 눈. 千里客: 천리의 여행을 떠나는 손. 智異山: 삼도를 접한 지리산. 裡: 속. 趁: 뒤쫓아 따라붙다. 春陽: 봄볕. // 去天: 하늘에 닿다. 無尺: 거리를 헤아릴 수 없는. 九曲路: 구곡령 길. 轉回: 뒤틀리다. 不及: 미치지 못하다. 我心長: 내 마음의 (뒤틀린)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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