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없는데 깊은 숲에서 풍겨온 산의 향기여 : 藥師庵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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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없는데 깊은 숲에서 풍겨온 산의 향기여 : 藥師庵途中
  • 장희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4.10.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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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박사의 번안시조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40>

藥師庵途中(약사암도중)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 하니
구름 속 길이라니 저리도 그윽하랴
산 향기 풍기는 숲속 물 끝엔 꽃이 없네.

十里猶堪半日行 白雲有路何幽長
십리유감반일행 백운유로하유장
緣溪轉入水窮處 深樹無花山自香
연계전입수궁처 심수무화산자향

 

 

 

 

 


시인의 시심은 주변 환경이 바뀌면 가만있지 못했던 것 같다. 길을 걷는 도중에도 잠시 쉬는 시간에도 시상이 떠오르면 주체할 수 없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암자를 찾아가는 부푼 기대일랑 아랑곳 하지 않을지라도 덩어리로 뭉쳐 나오는 시상을 머릿속 한 구석에 가만히 담아두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십리도 반나절쯤은 구경하며 갈만은 하다고 했다.

구경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내 따라 들어가노라니 물도 다한 곳 있고, 꽃은 없는데 깊은 숲에서 풍겨오는 산의 향기여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꽃은 없는데 깊은 숲에서 풍겨온 산의 향기여(藥師庵途中)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 하니 / 구름 속 길이 이리도 그윽할 줄이야 // 시내 따라 들어가노라니 물도 다한 곳 있고 / 꽃은 없는데 깊은 숲에서 풍겨오는 산의 향기여]라는 시심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반절쯤 갈만한 길 이다지도 그윽할 줄, 가노라니 물이 다해 풍겨오는 산의 향기’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약사암으로 가는 길에]로 번역된다. 약사암은 여러 곳이 있어 확실한 암자를 지적하기엔 미흡해 보인다. 대체적으로 경북 칠곡의 팔공산의 약사암과 광주 동구 증심사의 약사암이 있어 위 두 곳의 약사암 중 한 곳이 유력해 보인다.

한자로 지은 이름의 뜻은 그 의미가 깊다. 수도하는 암자를 스승으로 여기면서 보약으로 삼아 수도에 정진할 수 있은 암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을 때, 암자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은 넉넉해 졌을 지도 모른다.

십리하면 4km의 거리이니 불과 3~40분이면 넉넉히 걸을 수 있는 거리였겠지만 반나절이라면 자연에 흠뻑 취하면서 걸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인은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은 하겠는데, 구름 속 길은 이리도 그윽할 줄을 미처 몰랐다는 다소 놀란 기색을 시(詩) 속에서 보여준다. 다소 지루했겠지만 그런 표정을 모두 숨긴 채 시심의 허리를 부여잡는 형국이다.

화자는 시내를 따라 계속 들어가노라니 물도 다한 그곳엔, 꽃이 없어 향기가 없을 알았는데도, [숲에서 풍겨오는 아! 산의 저 향기여]라는 감탄사 한 마디로 모든 정황을 대변하고 있다.

구름 낀 도로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유난히도 그윽했을 것이다. 오히려 깊은 생각 없이 걸었다면 지루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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