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용 명장, 천년의 숨결을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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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용 명장, 천년의 숨결을 빚다
  • 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1.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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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금마면 인산리 출신의 도예가, 인천시로부터 ‘명장’으로 인정받아
잠들어 있던 고려~조선시대 서민의 자기, 장인 손에서 다시 눈 떠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에도…도공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이 자리에


천년의 시간을 서민과 함께한 녹청자, 그 숨결을 빚어내기 위해 수십 년간 힘써온 도연 김갑용 장인이 지난달 인천광역시로부터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인천시는 각 군·구에서 추천된 8명의 공예인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 12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1차 서면평가를 거쳐, 2차 현장평가와 3차 면접 등 엄정한 심사를 통해 공예 명장 2명을 최종 확정하고 공예명장 인증서를 수여했다.

인천시는 지난 2010년 공예산업 발전과 공예인 사기 진작을 위해 ‘인천시 공예명장 선정 및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회째 공예명장을 선정해오고 있다. 그가 명장으로 인정받는 데는 녹청자 복원·연구 활동에 매진한 약 30년의 세월이 바탕이 됐다.

녹청자는 통일신라 말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천 년의 시간을 서민과 함께 한 도자기다. 김갑용 명장은 녹청자의 매력으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꼽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고려청자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흙을 수비를 통한 탈철과정을 통해 얻은 고운 미분으로 만들기에 표면이 매끄럽습니다.

거기에 문양이 더해져 화려한 매력을 뽐내죠. 그에 반해 녹청자는 거친 태토와 소나무 재로 만든 잿물 유약을 시유해 구워 표면의 유약 상태가 거칠고 고르지 못합니다.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녹청자는 거친 태토를 썼기에 자연적으로 숨을 쉬고 있습니다.그 모습은 마치 우리네 평범한 사람을 닮은 듯 하지요”미적표현보다 생활용기의 기능성에 초점을 둔 실리적인 자기였던 녹청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시간을 서민의 생활 속에서 함께 했다.

김갑용 명장은 “고려청자가 귀족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특수 상위 계층의 장식용 또는 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면, 녹청자는 서민과 함께 한 민요였다”고 표현했다. 그는 귀족의 역사만 조명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절대다수를 이루는 서민의 삶과 문화를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녹청자 속에 깃든 우리 조상들의 정체성을 재현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을 닮은 녹청자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평생을 옹기장으로 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금마면 인산리 출신인 그는 평생 옹기를 굽던 아버지 아래서 처음 흙을 만졌다. 선친 故 김동진 씨는 금마에서 5대를 이어 옹기를 굽던 옹기장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기억은 언제나 심혈을 기울여 옹기를 만들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저는 아버지를 옹기장 최고 장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옹기는 그저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가볍고, 단단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런 옹기를 만드셨습니다.”

눈이 오던 날, 그는 명장으로 인정받았다는 증표인 인증서와 상패를 가지고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경기도 파주의 광탄 천주교 묘원을 찾았다. 평생을 옹기장으로 묵묵히 흙을 굽던 아버지 앞에 상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묘역 앞에서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겠노라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하늘에서도 기뻐하시겠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도공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녹청자 연구에 매진한 30여년의 세월 속에는 긴 시간만큼의 열정이 녹아있다. 인천시 서구 경서동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옛 녹청자보호막사를 발견하게 된 것이 녹청자 연구의 시작이었다. 경서동의 녹청자도요지가 발굴된 것은 1965년이었지만 그가 처음 녹청자에 연구에 매진할 당시인 80년대 초반까지도 녹청자에 대한 연구는 미비했다.

그는 문헌 속에서도 녹청자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어 직접 발로 뛰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경서동 일대의 개천에서 녹청자 파편을 모았다. 갈라보기도 하고, 직접 구워 온도를 찾고, 조직도를 분석하며 녹청자의 제조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갔다. 

수 천, 수 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갈등도 적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이나 후원도 없이 홀로 복원 노력에 힘을 쏟는 데는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녹청자 복원을 중단하지 않은 것은 누군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절되었던 녹청자 복원 연구 활동을 하면서 거듭되는 실패로 좌절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공으로서의 책임감이 먼저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천 년을 숨 쉰 그릇을 살려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녹청자 연구에 매진한 지 30년, 인천시 유일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녹청자 도요지를 중심으로 녹청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녹청자 도요지가 있는 인천 서구의 경서동에는 지난 2002년 녹청자 박물관이 들어섰으며, 지난 2010년부터는 인천 서구에서 매년 녹청자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천시는 녹청자에 관한 팜플렛을 발행하기도 했다. 녹청자가 인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서 자리매김한 모습이다. 외형적으로 높아져가고 있는 녹청자에 대한 관심에 비해 실제 녹청자를 빚어내고 있는 도공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김갑용 명장은 얼마 전 공방을 15평의 작은 공간으로 옮겼다.
 


100평의 공간에 총 세대의 가마가 있던 그의 공방이 도시개발사업으로 인해 밀려났기 때문이다. 토지주가 아니었던 그는 가마 한 대 값도 안 되는 보상을 받고 공방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세 대의 가마 중 지금은 제일 작은 가마만이 남아있다.

정부나 시의 지원 하나 없이,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야 할 책임을 홀로 지고 선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도공 한 두 사람만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기는 힘듭니다. 정치, 행정,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을미년 새해에도 그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녹청자 연구에 더욱 매진할 생각이다. 이번 달 말로 예정된 녹청자진흥회 주관의 불우이웃돕기 행사에서 녹청자를 전시·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봄꽃이 필 무렵인 4, 5월 즈음에는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벌써부터 그는 작품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나니 그 이름만큼이나 책임감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작품의 질을 높이려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올해 열 전시회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쓰인 생활자기를 비롯해 난이도 있는 작품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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