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곡<柒谷→漆谷>, 경북 칠곡<漆谷>’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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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칠곡<柒谷→漆谷>, 경북 칠곡<漆谷>’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7.17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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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칠곡·경북 칠곡(漆谷), 경남 의령 칠곡(七谷) 혼선
경북도내 기초단체 잇달아 행정구역 명칭 변경 움직임

광복 70돌을 맞는 올해, 일제 강점기 때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국토의 지명에는 일제강점기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가운데 이를 바로잡아 일제 잔재를 없애고 민족정신을 곧추세우려는 움직임이 전국의 지자체에서 시작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일제시대 때 한반도 마을이름과 지명도 침탈의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지명이 한민족의 기상을 일깨운다는 구실을 붙여 일본제국주의는 대대손손 내려오던 산천과 마을 이름을 짓밟았다.

최근 경북도내 기초단체들이 잇달아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령군 고령읍과 울진군 서면, 원남면이 올해에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는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의도이다. 그러나 지명을 바꾸는 일이 수시로 할 수가 없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명칭을 변경하기는 하되 좀 더 신중히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경상북도 각 시·군이 일제시대 때 빼앗긴 마을이름과 지명 복원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민들도 청원운동 등으로 행정구역과 마을 이름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경북 경산시, 칠곡군 왜관(倭館)읍, 청송, 영덕군 등이 지명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는 지역들이다.

대구 칠곡의 지도. 원래의 칠곡(柒谷)이란 한작 보인다.

왜관(倭館),‘일본인 여관’이란 뜻으로 명칭 변경 해야
경북 경산, 칠곡군 왜관, 청송, 영덕 등 지명 논란일어

특히 경북 칠곡군의 왜관명칭변경추진위원회는 ‘왜관(倭館)’읍은 ‘일본인 여관’이라는 뜻으로 왜색이 짙어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왜관은 6·25 당시 다부동전투의 승리로 세계전사에 기록된 명칭이며, 조선 태종 때 왜인을 위한 교역 장소로 이용된 후 1904년부터 왜인의 여관이 늘어나면서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 반대 입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향토사학자들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일제가 붙인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지적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한국인의 정기를 끊고 대동아공영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많은 지명을 고쳤다는 것이다. 경북 칠곡군의 군청소재지가 일제강점기 이래로 칠곡읍이 아닌 왜관읍이다. 옛 칠곡읍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의 금호강 이북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옛 칠곡읍은 구한말까지 칠곡군의 중심지였으나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동군과 칠곡군을 통합하면서 군청을 왜관읍으로 이전했다. 결국 옛 칠곡읍은 1981년 대구시가 대구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대구로 편입됐다. 따라서 원래의 ‘칠곡(대구 칠곡)’과 현재의 ‘칠곡군’은 애매모호한 관계가 돼 버렸다. 여기에 경남 의령군에 또 하나의 칠곡면(七谷面)이 있다. 혼선을 일으키는 시발점인 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곳이 잊혀져가는 ‘칠곡(대구시 북구 읍내동 일대)’의 이름과 옛 역사를 되찾는 일에 팔을 걷은 사람이 있다. 칠곡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은 주요기관 뿐만이 아니라며 각종 자료를 내보이며 설명에 열정을 보인다. 1990년대 도시개발 당시 청동기, 철기 시대부터의 유적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왜적들에게 유린당할 때 명나라 지원군이 주둔한 경상감영이 설치된 곳도 ‘칠곡’이다. 그럼에도 어느 곳에서도 역사의 흔적들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칠곡 이름 찾기’운동에 팔 걷은 대구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배석운 추진단장을 만나 대구 칠곡의 지명 되찾기와 지명 지키기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들어봤다.

대구 칠곡 도호부 지도. 임진왜란때 경상감영이 설치된 곳도 칠곡이다.

 


대구 칠곡 이름찾기 나선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배석운 추진단장

대구시민들에게 “칠곡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일부는 칠곡군이라 답할 것이고, 일부는 팔달교 건너 북구 읍내동 일대를 말할 것이다. 이렇듯 ‘칠곡’이라는 지명을 두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일부 칠곡 토박이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말할 때도 “대구 칠곡입니다” 또는 “북구 칠곡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배석운 단장이 팔거역사문화연구회를 만들고 ‘칠곡 이름 되찾기 운동’에 나선 이유다. 일제의 손아귀에 나라가 휘둘리면서 1914년 칠곡군청이 왜관으로 옮겨지고 ‘칠곡향교’를 제외한 모든 기관들이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 배 단장의 주장이다.

배 단장은 팔거역사문화연구회를 발족한 뒤 칠곡향교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문가를 초빙한 강연회를 열고, 대구 칠곡의 역사적 유래를 알리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했다. 이름이 사라지면 칠곡의 역사도 함께 잊힌다는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배 단장에게 지명은 그만큼 중요했다. 지명이야말로 후손들이 고향을 찾아올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법률상으로는 ‘칠곡’이 경상북도의 군 이름으로 명명되면서 대구시 북구 읍내동 지역에서는 사실상 ‘칠곡’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강북’ 또는 예스럽게 칠곡의 한자 뜻을 풀어쓴 ‘옻골(漆谷)’이란 명칭을 사용합니다. 옻나무가 많아 칠곡이라 불리웠는데 사실은 그럽지 않아요. 원래는 ‘일곱 꼴짜기’라는 뜻의 ‘칠곡(七谷)’을 같은 뜻의 ‘칠곡(柒谷)’으로 바꿨다가 같은 뜻의 글자인 ‘칠곡(漆谷)’으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옻칠할 칠(漆)’대신 ‘옻나무 칠(?)’을 쓰는 쪽이 자연스러운데, 옻나무 칠은 쓰이지 않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들이 늘어나며 지명도 자연스레 변하고 있다”며 “처음 칠곡이란 지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칠곡초등학교 100년사’를 편찬하는 모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우선 역사로 본 칠곡을 자체적으로 책자로 제작하면서 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칠곡초등학교 자리가 옛 칠곡도호부 관청자리였습니다. 문화재연구원 등을 찾아다니며 유적과 유물, 토호세력, 고지도 등의 자료를 찾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한 북구 주민 6200여 명이 민원을 제기하면서까지 대구도시철도 3호선 305호 역의 명칭인 ‘칠곡역’을 지킨데 대해서 “대구도시철도 3호선의 역 가운데 북구 구암동에 위치한 ‘칠곡역’의 명칭을 두고 논란이 일었는데, 구암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 대구도시철도 3호선 305호 역의 명칭을 ‘구암역’ 또는 ‘함지(산)역’으로 정해줄 것을 대구시와 도시철도건설본부 등에 요구했어요. 하지만 건설본부는 3호선의 30개 역명을 정하면서 305호 역은 ‘칠곡역’으로, 바로 다음 역인 306호 역은 ‘구암역’으로 명칭을 확정했습니다. 사실 ‘칠곡역’이 들어서는 구암동을 포함해 북구 강북지역 8개 행정동(관문·관음·구암·국우·동천·읍내·태전1·태전2) 가운데 ‘칠곡’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역의 명칭을 ‘칠곡역’으로 정해진 까닭은 이 지역이 30여년 전 대구시가 직할시(현 대구광역시)로 승격될 당시 경북 칠곡군 칠곡읍이 편입된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배 단장은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애족입니다. 초중고교에서도 이것을 가르쳐야 하고, 지역사회에서도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 고유지명은 글자 하나하나에 우리의 삶의 흔적과 혼이 담겨져 있는 생생한 역사입니다. 일제에 의해 사라져버린 고유지명을 되찾는 사업에 정부와 국민들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이처럼 지명을 되찾고자 하는 전국의 자치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함께 토의하고 대책을 공유하는 길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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