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독립장’ 추서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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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독립장’ 추서 독립운동가들
  • 홍주일보
  • 승인 2015.08.0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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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 수훈자 4명의 활약상

이 땅에서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홍성군에서도 많이 나왔다.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운동가가 198명이나 된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았다. 정부는 독립 유공자들에 대해 공적에 따라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등의 순으로 수여하는데 홍성군의 경우 대한민국장은 한용운, 김좌진 2명이고 대통령장은 없으며 독립장이 4명이다. 이들 4명의 활약상을 소개한다.<편집자주>


 

홍주의병 전투기록(1906년).

 

홍주성 동문의 1910년대 모습.

△ 이필봉

의병활동하다 일진회 끄나풀 살해
일경에 붙잡혀 투옥됐다 중국망명

이필봉(1884.12.11 ~ 1950. 3. 5)은 오양선이 이끄는 의병진에 가담한 뒤 1908년 11월 19일 정택하·전봉학·채한영 등과 같이 총칼로 무장하고 홍주군 화성면 제곡동으로 갔다. 거기서 의병의 동태를 탐지해 일제 헌병에게 밀고하던 친일 일진회원 이종국을 붙잡아 결박해 같은 면 용두리로 끌고가 참살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 뒤 1909년 6월 1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모살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같은 해 8월 16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됐다.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돼 1919년 8월 출옥한 후 1940년 3월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노을룡

암살 및 파괴공작 할동 전개
군관학교 졸업후 독립군양성

노을룡(1895. 3. 28~1944)은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 암살 및 파괴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월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그가 속한 의열단 역시 의열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됐다.이에 따라 1924년 4월 김원봉이 중국 국민혁명의 대본영이 되어버린 광동에 머물면서 국민정부와 한중연합을 통한 반제·반일투쟁을 강화할 것을 역설, 1926년 봄, 장개석으로부터 황포군관학교의 입교를 허락 받았다.

1926년 3월 김원봉·박효삼 등 의열단원들과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보병과에 소속돼 전술학·군제학·병기학·군대정치공작 등을 학습하고 10월 졸업하고 중국의 국민혁명군 초급장교로 임관, 김원봉과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그해 12월 일어난 광주봉기에 박건웅 등과 함께 참여, 반일혁명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1927년 4월 왕자량 등과 함께 의열단 남창지방집행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8월 남창봉기에 참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정부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의열단의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 1932년 장개석의 원조로 김원봉이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교외의 탕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 대부실 교관으로 부대교련 등을 담당, 사관생도를 양성·파견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게 했다. 1933년 말에는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육총대 제4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1935년 북경에서 의열단원 김시현 등과 함께 한인 부일배를 처단하였고, 하남성 개봉에서 일제 비밀 정보원인 중국인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경 일경에 체포돼 순국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김복한

벼슬 버리고 낙향, 항일의병 할동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 발송 참여

 

김복한의 재성록.

김복한(1860. 7. 24~ 1924. 3. 29)은 1892년 문과 급제,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의 등을 거쳐 1894년 승정원 승지에 제수됐다.그해 6월 갑오경장이 시작되고 국운이 기울어져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홍성)로 내려왔다. 이듬해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내종형인 전 승지 이설 등과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홍주목사가 일제와 내통하는 바람에 일본군에 잡혀 투옥됐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자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짐을 꾸려 보령 산중으로 들어가 학도들과 강론하며 지내다 성균관장에 제수됐으나 왜적과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하여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지용·박제순·이완용 등 5적의 참수를 간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투옥됐다. 1906년에는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에도 의병 은닉과 민심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하고 어렵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됐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로는 일제의 심한 감시 속에 두문불출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했다. 또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발송했다가 붙잡혀 투옥됐으나 중병으로 90여일 만에 석방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홍주성 동쪽 성곽.

 

홍주아문.

△ 이상만

임시정부 검사원장, 통일정국 모색
동포 안전귀국 맡아 과로 귀국후 병사

이상만(1884.1.5 ~ 1955.1.8)은 191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에 감리교 목사가 됐다. 1919년 3월 한국독립운동본부의 지령으로 중국 북경에 파견돼 박정래·조두진·유장연·전재홍·유중한·연병주·최훈식 등과 더불어 신대한동맹회를 조직, 박정래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았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했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의정활동에도 참여했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 정착하자 의정원 정기의회에 참석, 제4차 개헌을 단행하게 되자 임정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주석 중심체제로 지도력을 강화했다. 또한 1941년 9월 회계원검사원으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10월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이 됐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김붕준의 탄핵을 요청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행동준승 9개항의 취소를 요구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정국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주력했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중앙감찰 위원에 선출됐다. 1944년 의정원회의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 지도체제를 개편하게 되자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을 맡아 활약했으며, 1945년에는 화중구 한교선무단장이 됐다. 1946년 임정 주화대표가 됐으며, 다음 해에는 대만 한교협회 이사장으로 우리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고 1949년에 귀국, 요양 중 병사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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