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우리 유산 댕댕이로 계승하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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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우리 유산 댕댕이로 계승하는 장인
  • 한관우·장윤수 기자
  • 승인 2015.09.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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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전통기업 대를 잇는 사람에게 길을 묻다 <8>

 

▲ 백길자 선생이 댕댕이로 만든 채반들.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댕댕이덩굴과 댕댕이장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댕댕이덩굴과 댕댕이장 ‘댕댕이장’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간장이나 된장과 같은 우리의 발효음식 장(醬)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일장이니 상설시장이니 하는 시장(市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댕댕이’는 새모래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인 ‘댕댕이덩굴’을 의미하며, 장이라는 글자는 기술자를 의미하는 장(匠)이다. 즉, 댕댕이장은 댕댕이덩굴을 엮어 생활용품이나 장식품을 만들어내는 기능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이를 의미한다.

댕댕이덩굴은 한자로는 용린(龍鱗)·상춘등(常春藤)·목방기(木防己)라 쓰고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경상남도에서는 장태미 또는 장드레미라 불렸으며, 전라도에서는 댐담, 제주도에서는 정당·정등·정동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처럼 댕댕이가 다양한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댕댕이덩굴을 이용한 댕댕이장이 흔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댕댕이를 엮는 기술은 불과 수 십 년 전인 1950~60년대만 해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것이었고, 실제로 집집마다 댕댕이로 만든 바구니나 채반, 수저통 등이 사용됐다.

댕댕이덩굴의 줄기는 내구성이 강하고 탄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물에 젖으면 구부러져서 공예를 하기에 아주 적합하며, 짜임이 섬세하고 질감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또, 짚으로 만든 것보다 탄력이 좋고 통풍이 잘 돼 곡식을 나르거나 말리는 데에도 적합하다. 제주도에서는 댕댕이로 만든 모자인 정당벌립 또는 정당모자가 있었는데, 차양이 넓어 목동이나 농부들의 필수품이기도 했다.

세월 흐르며 사라져 전국에서 백 선생 유일하게 남아 

이처럼 전국 어디서나 사용되던 댕댕이 공예품은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달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고, 그것을 만드는 기능마저 단절돼 최근에는 국내에서 댕댕이를 엮어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손에 꼽을 만하다. 그런데 우리 지역인 광천읍에 아직까지 댕댕이로 생활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 바로 지난 2001년 무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된 백길자(68) 선생이다. 백길자 선생은 댕댕이뿐만 아니라 싸리·보리 짚·밀대 등 풀공예 전반에 걸쳐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3대에 걸쳐 가업으로 댕댕이 공예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재질의 그릇들이 없었죠. 전부 다 대바구니나 댕댕이바구니, 짚 바구니 등을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도 수저통이나 비누 바구니를 댕댕이로 만들어서 물에 헹궈서 건져내 사용하곤 했죠.”  과거에 보리쌀을 삶아 밥을 할 때는 가마솥에 댕댕이 줄기를 얹어놓으면 그대로 삶아지곤 했는데, 이를 이용해 커다란 바구니 등을 만들어 사용했다. 짚으로 만든 바구니나 소쿠리는 벽에 걸어놓으면 구부러지고 다시 펴지지 않는데, 댕댕이는 오래 걸어놓아도 구부러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 고급 생활용품에 속했다. 또 짚으로 만든 바구니나 소쿠리는 간격이 크고 넓어 입자가 작은 곡식은 담을 수 없는데 댕댕이로 만든 것은 간격이 아주 조밀해 깨 같은 곡식까지도 담을 수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업 잇고 아들도 이으려 희망 
 

▲ 백길자 선생이 댕댕이를 엮고 있다.

“친정아버지가 댕댕이로 생활용품들을 참 잘 만드셨어요. 학교를 갔다 오면 아버지께서 엮으시다 두고 나가신 댕댕이가 있어 제가 엮곤 했는데, 돌아오시면 ‘네가 엮어놓으면 다시 푸는 게 더 어려우니 하지 말라’곤 하셨죠. 저는 당진에서 홍성 장곡면으로 시집을 왔는데, 친정에 댕댕이 엮는 법을 배우러 갔었습니다. 아버지는 ‘엮을 것 없다’ 하시며 자신이 직접 만드신 것을 내어주셨죠. 하지만 아까워서 아직까지도 제가 만든 것만 사용하고 아버지의 작품은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농한기가 되면 모든 집이 댕댕이로 만든 생활용품을 자급자족했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큰 멍석을 깔아 놓고 일곱 여덟 명씩 앉아 댕댕이나 싸리로 광주리도 만들고 솔도 만들어 식구들이 사용했다.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농촌의 사라진 풍경이다. 백 선생은 “7남매 중 유일하게 댕댕이를 엮고 있다”면서 “지금 무형문화재 지승장인 최영준 선생이 과거에 이웃사촌이었는데 댕댕이로 계속 작품을 만들라고 권유했는데 그것이 이어져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최영준 선생이 무형문화재연합회에서 풀 공예 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저를 추천했고, 문화재청 발굴단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저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실생활에 사용하는 커다란 소쿠리나 바구니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문화재위원이었던 김삼대자 교수는 제가 만든 공예품들을 살펴보더니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서 ‘작더라도 섬세하고 꼼꼼하게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한다’며 그냥 돌아갔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지만 백 선생은 발굴단의 말을 참고해 섬세한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점점 그 실력이 발전해갔다. 또 백 선생은 이전에는 댕댕이를 염색하지 않고 나일론 줄과 함께 엮어 꾸미곤 했는데, 발굴단에서 ‘나일론 줄 같은 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참고해 천연 염색을 한 댕댕이로 무늬와 색깔을 입힌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 충남도에서 문화재를 발굴하던 때, 최영준 선생은 다시 한 번 백길자 선생을 추천했고, 공교롭게도 같은 심사위원인 김삼대자 교수가 충남도 위원들과 함께 백 선생의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됐다.

“교수님이 저희 집에 올 때 ‘아무래도 전에 갔었던 그 집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집에 가도 소용없는데’ 하고 어쩔 수 없이 왔는데, 제가 새롭게 만든 작품들을 보고 ‘이렇게 빨리 발전할 수도 있느냐’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후 김삼대자 교수는 백 선생의 작품을 촬영해 가져가며 “문화재위원 10명이 모두 인정을 해야 문화재가 될 수 있으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며 돌아갔는데,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백길자 선생은 문화재로 등재될 수 있었다. 이후 백 선생은 바구니에 뚜껑을 만들어 씌워보고, 도자기모형이나 컵받침, 모자, 쟁반 등 더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중한 유산 후대에 계속 계승될 수 있기를”


“아쉬운 부분은 문화재보호과에서는 옛날 방식을 하나도 바꾸지 말고 고수하며 작품을 만들라 하고, 문화관광과에서는 다양하게 변형시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보라고 하는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물론 과거의 방식도 중요하지만 현대에 발맞춘 창의적인 작품들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이후 백 선생은 부천 엑스포 전시장이나 아산 짚풀문화제, 홍성역사인물축제 등을 오가며 댕댕이장을 알렸고, 작품도 큰 호응을 얻어 많이 팔려나갔다. 지금은 대학교에 재학 중인 백 선생의 작은 아들과 의상 디자이너인 며느리가 댕댕이장에 큰 관심을 갖고, 가업을 이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생계와 연계가 안 되는 일이다보니 ‘이것만 하며 살아라’ 하긴 참 어려운데, 그래도 작은 아들이 댕댕이를 참 잘 엮어요. 제가 만든 채반과 아들이 만든 채반을 똑같이 내놓고 팔아보면, 아들 것이 항상 먼저 다 팔리더라고요.” 댕댕이는 8월 한 달 간 채취한 것을 말려 1년간 사용한다. 백길자 선생의 마당에서는 남편인 김성환(68) 씨가 한창 댕댕이 잎을 따고 줄기를 손질하느라 분주했다. 김 씨는 백 선생과는 또 다르게 짚풀 공예로 이름이 나 있다. 현재 짚풀공예 강사자격증을 가지고 문화원이나 학교로 출강을 나갈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구항면 거북이마을에서 짚으로 거북이를 만들어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하우스를 만들 때 쓰는 철로 지지대를 세우고 짚을 얹은 뒤 무늬까지 넣어 커다랗게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김 씨는 현재 백길자 선생의 이수자로 등재돼 있는데, 백 선생이 문화재로 등재될 때보다 한층 더 까다로워진 조건에서 어렵게 이수자가 됐다는 후문이다. “과거에는 흔하디흔한 것이 댕댕이장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문화재로 남아 저 혼자 만들고 있네요. 앞으로도 잊혀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것들이 오래도록 남아 후대에 계승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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