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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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1〉
  • 글=조현옥 전문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0.2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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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 교우촌이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는 황무실.

지난번 저녁 6시에 끝난 고덕공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여기서 시작해 상리공소로 향하기 위해 오후 2시 30분 고덕공소를 출발했습니다.

과수원일로 분주한 한태상(바오로) 어르신은 뵙지 못하고 고덕공소의 옛 기억을 전화로 전해만 들었습니다. 지금은 덕산성당의 관할 하에 있지만 처음엔 합덕성당 큰 미사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잦은 이사가 있었군요. 대전교구의 행정체계가 변해 덕산성당과 삽교성당으로 현재 덕산까지. 또한 공소 건물도 여러 차례 옮겨야 했더군요. 최종진 회장님 댁에서 시작해 교우들의 협력으로 금융조합건물을 사고 지금의 땅으로 옮겨올 때까지 수많은 노력이 엿보입니다.

공소만 넓어진 것이 아니라 교우수도 대폭 늘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선교를 했느냐는 질문에 “그게 말예요. 누가 갑자기 임종을 앞 둬서 대세를 주잖아요. 아, 그러고 나면 또 괜찮아져서 교리 받고 신자가 된단말여. 그런 일이 많았지”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교우들의 협심으로 마당 넓은 공소를 가진 고덕공소는 현재 교통의 발달로 인해 소미사와 기도모임은 없고 덕산으로 나가며 6월부터 10월까지는 도보성지순례객들의 묵어가는 숙소로 이용이 되고 있다합니다. 

상리공소는 고덕에서 신리성지 방향으로 4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해서 고덕중학교를 지나 고덕 IC쪽으로 걸어 합덕 이정표를 보며 갔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신리 쪽이면 신암으로 가야 맞는데 합덕과 신암으로 갈라지는 길에서 합덕을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 “뭐 언젠가는 합덕성당이라도 나오겠지”하고 체념을 했습니다.

황금 들판에는 추수로 바쁜 사람들이 보입니다. 먼저 이른 벼를 베어낸 논에는 초록색 새싹이 되살아나 노란들판과 짝을 이뤄 진풍경입니다. 새로 난 도로 옆에는 가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탐스럽게 여문 미국자리공이 포도밭처럼 길에 뻗어있습니다.

거의 새까맣게 익은 자리공 열매는 먹음직스럽기까지 합니다. 허나 조심해야합니다. 자리공은 독이 있으니까요. 도꼬마리 군락을 지나다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작은 곁밭에 한쪽은 비료를 살짝 뿌려 놓고 삽으로 마른 땅을 파느라 땀이 송글송글 합니다. “양파 심을려고. 안 심을 수도 없고, 땅 팔라니 힘들고”라는 아주머니와 잠시 수다를 떨다가 반가운 이정표를 만났습니다. ‘황무실 성지’입니다.

고덕을 떠난지 3시간이 지나 저녁 5시 반입니다. 일찍 해가 지므로 황무실만 들렸다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는데도 찾을 길이 없어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십년 전쯤 한 분의 소개로 황무실을 가봤던 기억을 더듬어 드디어 찾았습니다.

황무실은 박해 당시 교우촌으로 병인년 박해 때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학생이던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의 스승인 이 매스트르(1808~1857) 선교사가 전교 도중 병사해 장사된 곳입니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는 다음해에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1856년)까지 임시 감목대리로서 활동했고,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이후 새로운 사목지인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해 활동하다가 1857년 1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여기 묻혔습니다. 뒤를 이어 1861년 랑드르 신부가 입국해 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해 이곳에 안장됐습니다.

위앵(마르티노)신부가 1865년 입국해 처 신리에 머물던 다뷜뤼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황무실을 사목 근거지로 삼아 활동을 하다 병인박해 때 잡혀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할 때까지 이곳은 내포의 중요한 교우촌이었습니다. 1970년에 랑드르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의 무덤이 발굴돼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된 후로는 이곳은 교우촌을 이룬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거진 나무와 잡풀이 휑하게 서 있는 주변의 무인주택과 어우러져 ‘황무실’이라는 이름만큼 황량하기만 합니다. 다만 작년 신합덕 성당 신자들의 손으로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만 땅 한 켠에 우뚝 서 이곳이 교우촌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황무실뿐만 아니라 신리 일대는 천주교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가 박해 때 거의 몰살되다시피 해 마을이 아예 없어진 곳이 여럿입니다. 

고덕공소와 합덕성당을 이어 당진 솔뫼와 신평성당까지 근방의 마을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합덕성당을 기점으로 다시 신암 여사울, 신리를 거쳐 고덕공소까지 펼쳐진 땅에 몰살돼 사라진 신자들의 대를 이어 새로운 천주교인들이 공소를 이뤄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그 안에 있는 상리, 양촌, 구만리 공소를 가지 못하고 오늘은 합덕성당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미세먼지로 해가 제구실을 못하고  붉은 탁구공으로 보였다가 허연 보름달로 보였다가 서산으로 지고 맙니다.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합덕에 닿을 것 같지는 않고 오늘은 밤으로 걸어가게 생겼습니다. 가을 밤 외길을 걸으며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길 빌면서 다시 쓰겠습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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