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홍주 땅이었을까? 시비정신 강한 유생들의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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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홍주 땅이었을까? 시비정신 강한 유생들의 항거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3.3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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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3>

의병항쟁 1910년 한일합방 후 국내외 독립운동 이어져
홍주의병, 시비·선비정신 강한 유생들 항거로부터 시작
제2차 홍주의병 안병찬 주도, 정산 천장리에 의진 설치
민종식 1906년 3월 15일 광시장터에서 첫 봉기의 깃발


어찌하여 홍주(洪州) 땅이 의병(義兵)의 발상지(發祥地)가 되었을까.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항쟁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규정했다. 박은식의 말처럼 구한말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항쟁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국내외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선비들과 민초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진 자발적인 구국운동은 일제 강점기 36년의 세월을 끝내고, 마침내 1945년 조국의 광복을 이끌어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의병항쟁 중에서 특히 의병정신을 잘 나타내는 것이 충남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펼쳐진 홍주의병(洪州義兵) 항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조양문(朝陽門)은 홍주성(洪州城)의 동문(東門)이며 홍주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그 때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보인다.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홍주지역 유림계는 기호학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홍주의 기호학파 유학자들은 김상하를 거쳐 한원진에게 심화시켰다. 한원진을 비롯한 한말 일제강점기 홍주지역 유학자들의 사상적 특징은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유생들의 적극적인 위정척사운동을 비롯한 항일민족운동을 일으키는 사상적 연원이 되었다. 홍주출신의 이도중, 이설, 김복한, 이우규 등과 문인들이 있었다. 특히 이설과 김복한의 위정척사론은 이돈필을 통하여 전해진 한원진의 호론적 학풍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홍주지역 유학자들 역시 그 영향을 받아 한원진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면서 스스로 ‘당문’이라 호칭하였으니, 이들이 ‘남당학파’이다. 이렇듯 홍주지역은 시비정신과 선비정신이 강한 유생들의 항거로부터 비롯된 한말의 의병항거 외세의 침탈과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정신의 결정체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앞에서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듯이 한말의 의병은 봉기한 시기에 따라 전기의병, 중기의병, 후기의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기의병에는 홍주지역의 의병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전기의병, 단발령 공포와 홍주의병 봉기
전기의병(1894~1896)은 1894년 7월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의 발발, 개화파의 변복령과 단발령 등의 친일적 개화정책의 추진과 명성황우가 시해된 을미사변 등에 항거해 유생주도로 일어났다. 1895년 11월 15일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선포하면서 재야 유생들의 반발이 거세졌고, 홍주에서는 홍주와 청양지역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봉기를 하기에 이른다. 제1차 홍주의병은 김복한, 이설, 임한주, 이근주, 안병찬 등 홍주지역 관료 유생들과 청양의 안창식, 이창서 등의 유생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는데, 이들은 1895년 11월 28일 화성(현재의 청양군 화성면)향회에서 100여명에 이르는 홍주일대 유생들이 참석하여 의병봉기를 결의하였다. 이에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하여 다음날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들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제일 처음으로 입성하였다.

김복한은 창의대장이 되고 ‘존화복수(尊華復讐)’라는 깃발을 세웠다. 이때 관찰사 이승우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 하는 이서배들의 회유에 거의(擧義)의 뜻을 번복하고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한 23명을 구금시킴에 따라 홍주의병은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홍주의병의 투쟁은 주자학 정신이 깔려 있어 반개화·반제국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 주자학적 성격으로 인한 동학농민군의 의병참여가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점에서 반봉건적인 성격은 찾기가 어려운데, 이는 일정한 한계로 지적되는 점이다. 하지만 홍주의병은 ‘거의소청(擧義掃淸)의 적극적인 반제국 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 1895~96년에 전개된 홍주의병의 민족보전의 투쟁정신은 홍주일대의 유생 층을 비롯한 농민층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대규모 항일투쟁인 1906년 홍주성 전투를 가능하게 하였던 계기가 되었다.

 

▲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에 위치한 청대사(靑垈祠) 홍주의병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안창식(安昌植)과 안병찬(安炳瓚).안병림(安炳淋)부자, 안항식(安恒植) 등의 곧은 뜻을 기리는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전기의병, 을사조약과 홍주유림의 항쟁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전기의병 이후 각지로 흩어졌던 의병들이 재봉기하여 중기의병이 시작되었다. 주로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투쟁을 강화하였는데, 이들 의병진들은 척왜(斥倭)를 목적으로 일본군의 주둔지나 거류지, 통신시설 등을 공격하여 일제의 전초기지를 무력화 시키려는 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중기의병 중에서 가장 큰 전투와 희생을 치른 의진은 홍주의병이었다. 홍성의 유림들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됨에 따라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895년 의병을 일으켰던 김복한과 이설은 상소를 올려 을사 5적의 매국행위를 맹렬히 성토하였다. 이들은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돌아와 안병찬 등에게 거의를 권유했으며, 전 참판 민종식에게도 서신을 보내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제2차 홍주의병은 안병찬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는 김복한과 이설의 권유를 받아들여 정산에 거주하는 민종식을 찾아가 그를 총수로 추대하였다. 민종식은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정산의 천장리에 은거 중이었다. 민종식 역시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반대상소를 추진하였는데, 그는 추대를 수락하고 군자금 5만 냥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정산 천장리에 의진을 설치하고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의병에 참여한 인물로는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호, 이만직, 성재한 등이다. 이들은 격문과 각국의 공사들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을 작성하여 의병참여를 호소하였다.

민종식은 1906년 3월 15일 예산의 광시장터에서 첫 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이튿날 홍주로 향하여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의병은 총을 가진 자 600명, 창과 칼을 가진 자 200명, 유생 300명 등 1100명 규모로 기록되고 있다. 홍주의병의 기세에 놀란 일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 잔혹한 방법으로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홍주의병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패퇴하고 말았다.

■시비·선비정신 강한 경오 밝은 홍주인
왜 하필 홍주 땅이었을까. 지금도 홍주성은 변함없이 의구하게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말 80년 만에 충남도청 등 행정기관이 옮겨와 터전을 잡은 곳이 이곳 홍주 땅이듯 홍주성은 행정의 중심이었고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심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최대(最大)·최다(最多)의 의병(義兵)이 거병한 곳이 홍주 땅이었을 것이다.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원인을 찾는다면 무엇보다도 이곳 사람들의 기질과 토호 양반세력들의 의식, 풍수적 요인뿐만 아니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진취적 기상,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이곳 홍주사람들의 성격, 흔히 ‘경오를 따지고, 경오가 밝으냐’를 중시하는 홍주사람들의 특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비정신과 선비정신으로 대표되는 홍주 사람들의 말투와 어법에서도 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질문과 판단을 요구하거나 대답을 요구할 때면 으레 ‘글쎄에~’라며 고개를 약간 갸웃하면서 생각과 판단을 위한 시간을 보류하며 사고(思考)하는 발어사부터 여유를 찾는 특징이 있다. 또 그것이 경오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스스로 판단하는 습성이 체질화 돼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홍주인(洪州人)으로 전 연세대 교수였던 김동욱 박사는 이곳 사람들의 성격을 “타 지방 사람으로서는 갑갑하기 짝이 없는 의사표시다. 그래서 판단이 정확하고 실패하는 확률이 적다. 소위 재는 행동 때문에 사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과감성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오늘의 사회에서 충청도사람이라 하면 정직한 사람으로 통하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라고 표현했다.

맞는 설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홍주인의 기질을 상징하는 일단은 홍주성의 성벽에 그대로 흔적으로 기록돼 있는지도 모른다. 홍주성의 켜켜이 쌓인 성(城)돌의 형상에서 옛날부터 겪어 온 홍주인들의 병난(兵亂)의 흔적(痕跡)과 의(義)에 살기위해 창의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선열들의 한(恨)이 혈흔(血痕)으로 붉은 석양빛을 받고 있는 듯 한 느낌은 착시현상일까.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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