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면목(本來面目), 인위적이지 않은 사물의 모습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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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면목(本來面目), 인위적이지 않은 사물의 모습 추구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03.3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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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2>

갈산 최경락 화백
▲ 갈산 최경락 화백이 작업실에 앉아 있다.

학창시절, 체육특기생으로 미술 체육 기로에서 갈등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함 시도하는 럭비공 같아
오는 8월, ‘징검다리’ 전 이후 ‘풍속화’ 전 전시예정

수원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갈산 최경락 화백(57)이 서부면 거차리에 내려온다고 해 그를 만나러 갔다. 서부면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해보니 금방 막 다진 대지 위에 올려진 컨테이너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바깥에 소파, 물걸레 등이 보였다. 컨테이너 작업실 단장에 한창인 최 화백이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줬다.
“아마도 귀소본능이 아닐까요? 지금까지는 주로 객지에서 생활했는데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무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생전 처음, 제 명의의 땅을 고향인 홍성에 마련했는데요. 고향은 제 작품의 모태가 되는 곳입니다. 이 곳이 제겐 하나의 큰 화폭입니다.”
학창시절 최 화백은 미술과 체육의 기로에서 늘 갈등했다. 좋아하는 미술을 선택하기엔 중학교 갈 형편이 안 될 정도로 집 안이 너무 어려웠고 체육을 선택하기엔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어 미술이 포기가 안 됐다.
최 화백은 갈산초등학교를 졸업 후 집안사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서산의 한 극장가에서 간판 그리는 일의 보조를 맡았다. 최 화백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극장화가는 최 화백에게 “너는 극장 간판을 그릴 아이가 아니다. 재주가 아까우니 여기서 썩지 말고 미술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배워서 꿈을 펼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가난한 최 화백에게 중학교 진학은 멀고 먼 산처럼 느껴졌다.
그는 학비 걱정 없이 중학교에 들어갈 방도를 찾았다. 그에게 길이 열렸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체육특기생으로 중학교에 가는 방법이었다. 체육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육상으로 충남에서 1등을 하기도 하며 각종 육상대회에서 실력을 증명했지만 그의 가슴 한편에는 화가의 꿈이 여전히 물결치고 있었다.

▲ 최경락 화백의 작품들.

그러던 어느 날, 조운선 미술교사가 최 화백의 집에 찾아왔다. 조 교사는 최 화백의 아버지에게 “경락이는 운동할 아이가 아니라 그림을 그릴 아이”라며 미술로 인도했다. 미술과 육상을 병행하던 그는 중 3때 군민체육대회에서 마라톤으로 1등을 하고 홍주고등학교에서 체육으로 발탁됐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업을 이어나가야했던 최 화백은 다시 한번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했다. 갈산면과 홍성읍을 등교하던 그는 홍주고 이사장에게 집에서 가까운 갈산고등학교로 전학 의사를 밝혔지만 쉽지 않았다. 체육특기생인 장학생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의사를 밝힌 끝에 갈산고등학교로 전학 온 최 화백은 갈산중학교 미술실에서 중학교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 전국을 휩쓸었다. 최 화백은 “당시 미술대회에 참여한 친구들이 ‘얘들아, 최경락 떴으니 그냥 가자’라고 말하기도 했죠. 허허”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최 화백은 대학교 진학에도 학비걱정이 앞섰다. 그에게 손 내민 대학교는 많았지만 4년 전액의 학비를 제안하는 곳은 흔치 않았다. 그는 안동대학교에서 미술 특채로 입학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땐 체육 특기생으로 학비 걱정을 덜고, 대학교 땐 미술 특기생으로 학비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결혼한 최 화백은 대학원 때 가정을 돌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출판사와 신문사의 삽화작업 아르바이트부터 고물수거까지 두루 전전했다. “어린이집 다니던 딸아이가 ‘아빠는 왜 다른 집 아빠랑 달라? 다른 집 아빠는 돈도 많이 벌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는데 아빠는 뭐하는 거야’라고 말하더군요. 딸아이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최 화백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계기는 공모전을 통해서였다. 대한민국 3대 미술대전 중 하나인 동아미술제에서 입선, 특선을 거쳐 2004년 동아미술상을 수상했다. 작년에는 ‘수원 예술인’에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업세계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카툰, 삽화, 인물, 한국화, 서양화, 도자기, 조형물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에 책, 도자기, 기왓장을 붙여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방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붙여진 별명이 ‘럭비공’이다. “저는 늘 다양함을 시도하고 변화하려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잖아요. 한 곳에 머무르기를 싫어합니다. 대학원 졸업할 때쯤 사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은 내가 갈 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필방에 붓들을 모두 써 봐도 성에 안차 직접 만들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최 화백에게는 ‘죽필화가’라는 별칭이 있다. 대나무를 망치로 쳐서 만든 죽필은 그가 찾은 최고의 붓이다. “대나무는 선비를 상징하지만 오늘날은 옛선비가 사라졌잖아요. 정신적으로나마 선비의 모습을 작품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선비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그림에는 어떻게 그려내야 할지 염두에 두고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
대나무는 최 화백과 닮았다.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곧음,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우직함이 그것이다. 물질의 풍요가 극에 달한 지금, 대나무처럼 비움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최 화백은 말하고 있다. 그가 죽필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의 작업이 채움이 아닌 비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최 화백은 작년 수원에서 징검다리 전을 열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가 작업의 모태가 됐다. 떨어져 있는 객체이며 현대인을 상징하는 징검다리는 개울을 건너는데 도움이 되지만 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하기 그지없다.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장소는 강가나 개울로 물이 있는 곳이다.
물은 생명이 나고 자라는 근원이다. 최 화백은 생명의 근원을 깊게 생각하고 결국 가야할 길을 걸어간다. 사물이 가진 본래의 특성대로 진실한 모습을 추구한다. “물성 그대로의 모습, 가공하기 전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제 작업은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가면의 틀을 벗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데요. 저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최 화백이 지난번 전시에서 사물의 물성을 보여줬다면 다음 전시에는 전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할 계획이다.
 “조선시대 단원, 혜원 이후 제대로 된 풍속화의 맥이 끊어졌는데요. 현대 풍속화 작품들은 풍속화 특징인 해학적이고 익살스런 모습으로만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음 작업으로는 선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생활의 여러 단면들까지 함께 새로운 시선으로 재구성해 선보일 계획입니다.”
최 화백의 초대 개인전인 ‘최경락 풍속화 전(가제)’은 오는 8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강남의 아트스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다.
 

최경락 화백은...
갈산면 상촌리가 고향인 최경락 화백은 갈산초등학교, 갈산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동양학과 특채로 입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한국화학과를 졸업하고 순천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개인전으로 1992년 수묵 展, 2012년 수원화성& 경기도 정치인 캐리커쳐 展, 2012년 죽의 유희 展, 2013년 환고 展, 2014년 오늘 展, 2015년 징검다리 展 등이 있다. 신문 및 단행본 삽화로는 매일경제신문의 ‘서울의 밤’, 문화일보의 ‘시의 창’, 금성출판의 ‘삼국유사’ 등이 있다. 1996년 대한민국기독교 미술대전 대상, 2004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 수원예술인에 선정됐다. 현재는 중부일보 만평을 그리며 작품활동 중이다.

글=장나현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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