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청양 정산에서 의진(義陣) 결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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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청양 정산에서 의진(義陣) 결성하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4.2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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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5>

제1차 홍주의병 1895년 4월 안창식 광천에서 모병
이승우 배반 1895~1896 홍주의병 실패, 활동 계속
민종식 의병장 박토 10여 두락 팔아 5만 냥 군자금
1906년 3월 15일 정산 천장리에서 홍주의병 시작돼

 

▲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는 의병장 민종식 유허비와 고택이 있다. 판서의 아들로 참판까지 지냈지만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항일의병운동에 나선 민종식 의병장은 1917년 6월 26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06년 3월 15일 청양 정산의 천장리에서 홍주의병이 시작됐으며, 광수장터(현재의 예산군 광시면 광시장터)에 6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1차 봉기를 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청양군 화성면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3월 17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다.

제1차 홍주의병은 1895년 4월 홍주군 광천(현 홍성군 광천읍)에서 시작된 안창식의 모병 운동에서 부터 비롯된다. 홍주군 화성(현 청양군 화성면)에 거주하던 안창식은 1895년 4월 23일 친일 내각에 의해 단행된 갑오개혁을 반역행위로 인식하고 광천에서 임정학 등과 함께 사민(士民)들을 동원하여 의병봉기를 시도하였다. 비록 거사가 실현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이 계획은 점차 구체화 되었는데 박창로, 이봉학, 이세영 등이 장곡에서 계획하면서부터다. 1895년 5월 22일 박창로를 동참시켰다. 그렇지만 이들의 계획은 6월 2일 서로의 뜻을 다시 확인 한 후 6월 9일 청양장터에서 봉기하기로 하였지만 당일 집결한 사람은 안창식과 박창로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세영, 박창로, 정제기, 송병직, 조병고, 김정하 등이 이세영의 집에서 집결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앞으로의 군사 활동을 위한 원칙을 재확인 하고, 군사모집,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이는 곧 단발령이 공포되면서 의병투쟁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됐던 것이다.

안창식과 채광묵은 1895년 11월 28일 화성의 강변에 사는 이인영의 집에서 향회를 실시하였고, 여기에 참여한 100여명의 홍주지역 일대의 유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군사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고 다음날 안병찬과 채광묵이 이 부대를 인솔하여 홍주성에 먼저 처음으로 입성하였다. 한편 11월 30일 예산 출신의 유생 이근주는 임승주, 임한주 등의 연명을 받아 단발을 반대하는 서신을 관찰사에게 보냈다. 이어서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봉학, 이세영, 기정하 등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홍주성(洪州城)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날에는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士民)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이들의 군사력으로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무렵 김복한, 이설, 홍건 등의 전직 고위 관리들이 합세하면서 그 기세는 더욱 높이 치솟게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2일 수백 명의 민병들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김복한은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에 김복한은 홍건 등과 함께 “우선 거사를 하기 전에 역적 강호선, 함인학의 목을 베어 높이 걸어서 관찰사의 뜻을 굳혀야 한다”고 지시하여 민병들은 경무청을 부수고 아전 강호선과 함인학 등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결박 구타했는데,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사에 참여할 것을 마지못해 승복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의병은 홍주부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수석으로 추대하였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면에 통문을 띄워 노약자와 독자를 빼고 각 호마다 한명씩 의병에 응모할 것을 독려했다. 관찰사 이승우는 승정 연호를 사용하여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 이란 이름으로 관내 절제사에게 명하여 당일로 군사를 모집해 오도록 하였으며, 이설을 불러 장계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격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창의소에는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이상린이 잔류하는 가운데 의병 초모와 산성 수리를 위하여 인사를 파견하였다.
 

▲ 예산군 광시면사무소 앞에 있는 병오홍주의병출진 기념비.

청양군수 전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포군 500명과 화포 1000자루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비록 관찰사로 부터 이를 전해 받지는 못하였지만 현직 관리로서 거병에 참가했다는 자체가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설과 김복한은 상소를 올린 지 이틀,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에 관찰사 이승우는 전승지 송언회, 아전 이주승, 이종응, 이봉흠, 최학연, 강호선, 함인학 등의 중지 요청에 따라 배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지였던 김복한, 이설, 홍건, 안병찬 등 총 23명은 12월 4일 경무청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들이 체포,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서산군수 성하영이 거느린 군사 수백 명은 해미에서, 남양부사 남백희의 수군 수백 명은 서해상에서, 대흥군수 이창세의 군사 수백 명은 홍주군 경내에서, 전 승지 이병억의 군사 100여명은 홍주의 서문 밖에서 홍주로 향하던 중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이후 구금되었던 김복한, 이설, 안병찬, 홍건, 송병직, 이상린 등의 인사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이어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12월 그믐날 밤에 석방됐다. 판사 김교헌은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던 것이다. 비록 이승우의 배반으로 1895~1896년의 홍주의병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에도 안창식, 청양군수 정인희, 이세영, 황재현 등이 공주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했다. 결국 이들 역시 패하기는 했지만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한편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했던 또 다른 세력인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결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특히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돌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며 1906년 초부터 의병봉기를 추진하였다. 민종식 역시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정산의 천장리에서 은거 중이었다. 민종식은 이미 고종의 은밀한 뜻을 강석호를 통해 전해들은 이후였다. 그러나 민종식도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반대상소를 추진했던 항일인사였다. 민종식은 하인인 김양규를 대동하고 이설과 김복한이 묵고 있는 집에 찾아와 상소문을 초해줄 것을 부탁한 바 있으며, 이설이 체포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산으로 내려온 바 있었다.

안병찬과 박창로, 이세영은 1906년 2월 28일 이세영의 집에서 만났으며, 다음 날인 3월 1일(음력 2월 7일) 이들은 정산의 천장리에 거주하는 민종식을 찾아가 시국을 토론하였다. 이들이 3월 11일 천장리에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많은 인사들이 민종식의 집에 참석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민종식이 그의 ‘심문조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처남 이용규를 비롯한 민종식의 지인들이 아니었던가 한다. 안병찬은 이들과 합세하여 민종식을 대장 직에 추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의 이세영의 일기에 의하면 ‘2월 17일, 갑인. 천장리 민 대감 집에 간즉 많은 선비들이 회집하였다. 21일 의병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 설이 밖에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경주 선비 양하룡(梁河龍)과 상의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하여 물러났다가 다음 달에 다시 정하자고 말했다. 양아(梁雅) 역시 그러자고 하여 민대감에게 말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민종식 일행은 3월 15일 의병을 봉기하기로 합의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안병찬도 홍주성 전투에서 산화한 채광묵에게 바친 제문에서 ‘2월 21일 홍주로 진격할 때 사민 수백 명이 따라서 민종식을 맹주로 하였는데’라고 한 것을 보면 3월 15일에 기병하였음을 알려준다. 민종식은 이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 놓았다. 이로써 1906년 3월 15일 정산의 천장리에서 홍주의병이 시작됐던 것이다.

민종식은 의진(義陣)을 편성하고 1906년 3월 15일 광수(光水)장터(현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大將壇)을 세워 천제(天祭)를 올렸다. 이때 편성한 의병조직은 창의대장 민종식, 창의대장 종사관 홍순대, 참모관 박창로, 유회장 유준근, 중군사마 박윤식, 행군사마 안병찬, 운량관 성재풍 등이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주(洪州)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夏牛嶺, 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 그리고 홍주성(洪州城)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하나에 1000냥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자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고 한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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