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 품은 고유지명 ‘홍주(洪州)’
왜곡·변질되는 정체성과 역사적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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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세월 품은 고유지명 ‘홍주(洪州)’
왜곡·변질되는 정체성과 역사적 진실은?
  • 한관우
  • 승인 2016.06.2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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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지명 홍주(洪州)도 되찾지 못한 웬 천년홍주기념사업?
왜곡·변질되는 역사와 행정, 정체성과 역사적 진실 밝혀야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천년홍주(千年洪州)기념사업 탁상행정·전시성사업 비난일어

 

땅이름(지명)은 가장 겸허한 모국어이자 무형문화재이다. 지명 속에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등 의 내력이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명이란 무언(無言)의 역사이다. 지명에 몇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 기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햇볕을 쬐면 역사요, 달빛에 물들면 야사’(野史)라는 말이 생겼다. 지명은 지역의 내력과 곡절을 숨죽여 외친다. 그런데 우리 지역의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는 어떠한가? 지명은 시간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작품이기도 하다.
홍주(洪州) 지명역사 천년의 풍상보다 36년 일제 식민지배의 훼절이 더 엄혹했다. 해방 이후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상회복 했지만 창지개명(創地改名)은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서 우리 지명의 대부분이 원상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발연대 이후 우리 손으로 행한 개악 사례도 적지 않지만 최소한 우리 지역의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지 못한 일은 일제의 잔재를 지금까지 안고 살아온 정체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창지개명(創地改名), 우리의 고유지명을 되찾지도 못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다. 마찬가지로 우리 지역의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홍주(洪州)와 결성(結城)에서 한자씩을 따서 ‘홍성(洪城)’으로 개명한 지명을 보면 또 하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합성지명이란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두 개의 지명을 합치면서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행정개편이라는 미명 아래 멀쩡한 두 개의 지명을 하나로 합쳤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뤄진 지명말살정책이었다. 지명 속에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얼과 문화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무서운 음모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나 지역의 지도자 모두가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못 들은 체 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다.
사라진 숱한 지명의 원혼 앞에 어찌 이리 덤덤한가?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전쟁이다. 독도냐 다케시마냐, 동해냐 일본해냐는 모두 지명선점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다. 해방 이후 흐리멍덩한 지명회복 실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성명(姓名)이 역사이듯 땅에는 지명(地名)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지역의 옛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를 되찾아야 하는 필연의 이유다.

■홍주지명(洪州地名) 고려 이전 ‘잘 알 수 없다’
홍주(洪州)는 고려 이전의 역사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따라서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서에서도 ‘홍주’의 연혁은 고려 초 ‘운주’로부터 시작된다. 운주성주(運州城主)가 ‘긍준(兢俊)’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면서 ‘운주(運州)’라는 지명이 고려가 건국한 918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태조 원년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웅주, 운주 등 10여 주현이 배반하여 견훤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운주’라는 지명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운주’라는 지명은 ‘웅주’에 대항하거나 겨루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웅주(공주)는 백제시대 후광을 배경으로 신라 통일기에 도독관이 중앙에서 파견되는 당시의 행정 및 군사의 거점이었다. 이에 반해 ‘운주’는 신라가 역사에서 퇴장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신세력의 거점이라는 점에서 웅주에 대한 경쟁의식이 발동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측면도 있다. 운주는 웅주와 발음이 비슷하다지만 운주는 새로운 시운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며, 웅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력의 거점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홍주(洪州), 왕건이 긍준을 홍규(洪規)로 하사 시점?
중요한 것은 홍주(운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이름이 등장하여, 고려 태조 왕건과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과의 관계, 고려 태조 왕건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과 그를 배출한 지역이란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홍주(洪州)’의 등장에는 당시 호족의 등장이 배경이 되고, 이로 인한 지방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지역으로 꼽히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홍주(洪州)에 대해서는 운주성주 긍준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운주성주 긍준이 태조 왕건과의 결합에 의해 홍주(洪州)가 거점도시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은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통하여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는데, 이때 태조의 12번째 후비(后妃)가 된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바로 홍주(洪州)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자 직(稷)인데 후손이 없었고, 실명(失名)의 공주는 태조의 제3비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 태자 태(泰)에게 출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명왕후의 둘째아들인 정종, 셋째아들인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기록된 태자 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홍규(洪規)’의 본관이 홍주(洪州)였다는 점에서 홍주지명(洪州地名)의 탄생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겠다.
‘홍규(洪規)’는 홍주(洪州, 또는 운주) 출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가 됐다. 927년(태조 10년) 음력 3월 태조 왕건은 운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때 운주성주였던 긍준에게 ‘홍규(洪規)’라는 이름을 주면서 ‘홍씨(洪氏)’를 하사했고, 홍규는 고려 태조 왕건(877~943)에게 자신의 딸을 바쳤으니, 그녀가 곧 흥복원부인 홍씨인 것이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은 왕건의 총29명의 아내 중  제12비인 점을 본다면 홍씨(洪氏)와 결혼하여 왕자와 왕비를 낳은 시점은 최소한 943년 왕건이 사망하기 이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운주성주였던 긍준에게 ‘홍규(洪規)’라는 이름을 하사한 시점에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론이 가능해 지는 대목이다.

■홍주지명(洪州地名), 918~1018년 이전 이미 사용?
이후 기록상으로 홍주지역은 성종 14년(995년) 운주(運州)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파견한 이래 현종 3년(1012년)에는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그 뒤 운주(運州)를 홍주(洪州)로 개칭한 뒤 양광도에 배속시키면서 3군 11현을 관할하도록 한 것이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이다.
따라서 충청도 4목(청주·충주·공주·홍주)의 지명변경과 행정개편에 관한 연혁을 보면 성종 14년(995년)과 현종 3년(1012년), 현종 9년(1018년)등 세 번의 개편에 따라 행정명칭이 변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행정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 9년(1018년)이라는 주장은 현종 3년(1012년)과 같을 주장일수도 있다는 견해다.
따라서 왕건이 긍준에게 ‘홍규(洪規)’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본관이 홍주(洪州)가 되었고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의 사용에 대한 추론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제도의 개편이나 행정지명의 변화에 따라 정식으로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를 떠나서 ‘홍주(洪州)라는 이름의 탄생이나 자연발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918년부터 943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추론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최소한 918년 이후에 등장하고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종9년(1018년)에 행정지명의 기록에 나온다면, 당시 일상적으로 기록이 여의치 않았던 점을 감안하다면 918년 이후 홍씨(洪氏)성(性)을 붙여 홍규(洪規라는 이름을 하사한 시기,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始祖)가 된 시기를 거쳐, 행정명칭으로 기록됐다고 주장하는 1018년 이전에 이미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결과라 하겠다.
따라서 일부 주민들은 “천년이 넘은 역사의 홍주(洪州)라는 고유지명도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웬 천년홍주기념사업이냐”고 지적하며 “기념사업을 하려면 지명을 되찾는 일이 필수적인데, 지명도 없는 기념사업은 다분히 탁상행정이며 전시성사업이다. 분명한 것은 왜곡되고 변질된 우리의 고유지명인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는 일과 역사적 진실을 밝혀 정체성을 찾는 일부터 하고 이후에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는 이유다.
‘홍주(洪州)’라는 지명 되찾기는 ‘시(市)’승격과 맞물린 지역 최대의 현안이다. 땅 이름도 못 찾고 시승격도 물 건너간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충남도청 내포신도시가 지명도 아닌 단지 개발구역 명칭인 ‘내포’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별도 행정구역이나 특례시로 승격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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