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복원, 홍주천주교 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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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복원, 홍주천주교 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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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1>
▲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는 홍주토포청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에 의해 끌려온 천주교순교자들이 갖가지 문초와 형벌 가운데에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 하였던 곳이다.

선교사들 입국 이전에 이미 자발적으로 신앙공동체 형성
천주교 전래 초기 100년, 정부 대규모 탄압 순교자 탄생
홍주천주교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복음전파의 못자리
이존창 여사울에서 선교 후 홍주지역 천주교 급속히 확산

 

현재 홍성지역의 역사문화적 상징인 홍주성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홍주성 복원의 또 하나의 핵심에는 ‘홍주천주교순교성지’가 있다. 홍주성 복원과 함께 홍주성지의 순교역사도 함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홍주순교성지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홍주성지성당의 역할과 기능이 한층 커지고 있다. 이렇듯 홍주천주교 순교성지를 비롯하여 충청도 지역에는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특히 홍주로 불리는 내포지역의 중심지인 홍성의 경우 홍주성 감영 터를 비롯한 순교성지가 많다. 인근의 예산군 신암의 여사울성지, 당진 합덕의 솔뫼성지, 신리공소와 구 합덕성당, 신평성당, 서산 해미의 천주교 순교지, 아산의 공세리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돼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서부지역인 홍주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했다. 홍주지역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1866년 최대·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됐던 곳이다.
 

▲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표지석 뒷면의 글.

■이존창의 전교, 홍주지역 천주교 빠르게 전파
조선 후기는 유교적 신분질서가 서서히 붕괴돼 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수도 있었다. 또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상민도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하지만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심해 백성들은 압제에 시달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계통의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지역에 이어 지고 충청도 내포지역으로 전파됐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홍주 출신의 이존창이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그들은 서양의 서적과 더불어 천주교에 대한 중국어서적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 후 17세기에 들어와 주로 북인 계열의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불교와의 차이점을 논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주로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이벽(李蘗),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남인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이벽의 제자인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정조 8년)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신앙열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충남지역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충남지역의 천주교회는 1784년 직후 내포지역인 홍주 땅에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홍주(지금의 예산군 신암면)출신이었던 이존창은 이벽, 이승훈, 정약용 형제와 교유하면서 기존의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는 양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존창의 전교에 따라 홍주지역에도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식 제사를 무시하는 천주교는 1785년(정조 9년)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가 득세하자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자발적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 100년 동안 정부로부터 대규모의 탄압을 받으면서 무수한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는 한국의 천주교가 가장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순교야말로 최상의 종교적 봉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박해시기의 충남지역 천주교회는 내포교회라고도 불린 정도였다고 한다. 내포지역이 충청도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한 상징성 때문이다. 박해기에 교회 안팎의 주목으로 인하여 다른 지역 보다 많은 신자들이 체포나 처형되었다. 홍주(내포)지역은 정조 8년(1784) 겨울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 근민당은 현존하는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이 아니라 안회당의 서쪽에 있던 사달정(四達亭, 옛 정사당·政事堂)의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정사당인 사달정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여하정.

■홍주순교성지 복자 4명 탄생, 복음전파 못자리
대전교구 소속의 홍주순교성지는 박해 초기(1792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순교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으며, 무명 순교자까지 합치면 모두 700여 명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현재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은 복자로 탄생했다. 또한 홍주천주교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복음전파의 못자리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예산의 여사울에서 선교를 한 후, 내포고을인 홍주지역에는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홍주지역에 박해가 시작되고 나서는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전국으로 피난을 감으로써, 조선 땅 전역에 천주교가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됐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목(洪州牧)을 두어 목사(牧使, 정3품)가 주재했던 홍주는 예로부터 교통, 체신, 행정의 중심지요, 국방의 요새지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지고, 많은 교우들이 있던 중심이었다. 여기에 홍주성지는 홍주 토포청(종3품의 영장 겸 토포사 관할)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에 의해 끌려온 순교자들은 갖가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 하였던 곳이다. 그 장소는 목사의 동헌으로 목사가 집무를 보던 근민당과 홍주진영의 동헌, 즉 토포사가 겸하던 전영장(前營將)이 집무를 보던 동헌인 경사당 앞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중에서 근민당은 현존하는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사적 제231호, 현 홍성군청사 내)이 아니라 그 서쪽에 있던 사달정(四達亭, 옛 정사당·政事堂)의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조양문)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실상을 찾아내고 진실을 밝혀 홍주성 복원과 함께 홍주천주교 순교성지도 체계적으로 복원하여 세계적인 명소가 돼야 한다. 홍주천주교 순교성지의 부활을 꿈꾸는 이유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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