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핵심인물 이설 등을 후원한 수당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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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핵심인물 이설 등을 후원한 수당 이남규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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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5>
▲ 홍주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암 이설의 고택인 ‘하허당(何許堂)’이 있었던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63번지. 지금은 월남참전용사인 박남순 씨가 ‘하허당’을 헐고 새로 집을 지어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100년 세월의 향나무는 그대로다.

이남규, 홍주의병 결성과정서 핵심인물 안병찬·이설 등을 후원
이설, 1878년 ‘의상척양왜소’서 강화조약 ‘항복조약’이라 통박
패산하였던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의병에 참여할 수 있게
홍주의병, 을미홍주의병과 밀접한 관련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


 

홍주의병은 거의 과정에서부터 해산 후 재기를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충청 호서지방의 유력인물이었던 수당 이남규가 시종일관 깊숙이 관계하고 있었다. 이남규는 1900년 비서원승을 끝으로 퇴관한 뒤 향리인 예산 대술에서 지내고 있던, 조야의 신망을 받던 우국지사였다. 이남규는 홍주의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들인 안병찬과 이설(李偰) 등을 후원하였으며, 의병장 민종식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홍주의병이 패산한 뒤 잔여세력이 각지로 흩어져 재기항쟁을 모색할 때 구심체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이남규였다.

그 다음해인 1907년 9월 일제 군경이 이남규 부자를 무참히 살해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익현이 주도한 태인의병은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더불어 중기의병을 대표하는 의진이다. 항일 무력전을 결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가운데서도 최익현은 상소와 격문·기서(寄書) 등을 통해 부단하게 의병투쟁의 정당성과 국권회복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따라서 최익현 의병은 홍주의병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청양군 정산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 항일의 두 거두인 최익현과 민종식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설의 고택 ‘하허당’의 옛 모습.

■동학농민군 항일의병에 참여하게 해
복암 이설(李偰)은 1876년 개항 이후에 척사의 대상을 일본에 집중시켜 ‘척왜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1878년 작성한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에서 강화조약은 수호조약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항복조약’이라고 이를 통박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을 마땅히 물리쳐야 하며 그 이유로써 첫째 적이 우리를 무고히 억압하고 있으며, 둘째 한두 명의 신하를 제외하고 저자의 부녀자와 아이들 까지도 분노를 하고 있음을 들었다. 이설은 일본을 격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우리는 ‘정(正)’이요 저들은 ‘사(邪)’이며, 우리는 순(順)하고 저들은 역(逆)하며, 우리는 주인이고 저들은 객이며, 우리는 많고 저들은 소수이며, 우리는 편하고 저들은 지쳐있다” 라는 5조목을 들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이 ‘금사학(禁邪學)’에서 ‘척왜(斥倭)’로 전환함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단순한 반대의 뜻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구체적인 이유들을 들면서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척왜론’은 1894년 이후 급속하게 침략해 오는 일본세력에 직면하여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의 ‘척왜론’은 이제 일본과 전쟁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기까지로 발전했다. 1894년 6월 20일 올린 ‘청물배중국척절왜구소(請勿背中國斥絶倭寇疏)’에서 그러한 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후 이설은 고향인 홍주군 결성으로 내려와 ‘척사상소’를 올리는 이외에도 척사운동의 발전적 형태인 의병투쟁에 참여하여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이 대일결전론은 동학농민군의 주요 이념인 척왜양창의론이 확대된 구국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들의 이념의 공통성은 패산하였던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의병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 복암 이설의 고택 ‘하허당(何許堂)’을 둘러쌓고 있던 돌담과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느티나무가 지금도 터를 지키고 있다.

■홍주의병의 정신적 지주 복암 이설
홍주의병은 중기의병 시기인 1906년 3월 15일경 광수(光水, 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1차 의병이 편성되면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의병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설(李偰)과 안병찬 등이다. 전기의병 해산 이후 은둔해 있던 이설은 을사조약 늑결 직후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조약을 성토하고 그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뤘다. 1906년 2월 석방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곧바로 의병 재거를 계획하고 동지 안병찬, 을미사변 이후 청양군 정산(定山)에 낙향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1861~1917 등과 연락하며 의진 편성에 착수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설은 안병찬에게 서신을 보내 재기항전을 촉구하는 한편, 민종식에게도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항일전을 선도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그대는 대대로 국가 중신의 집안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본래 축적하신 바인데, 이같이 다사(多事)한 날을 만났으니 더욱 읽지 아니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어떠하신가. (중략)그대의 마음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하실 것이라고 생각되오니 어찌 반드시 거듭 진달하겠는가. 다만 수십 년간 지내온 변고가 무슨 일인들 신자(臣子)가 죽음을 바칠 날이 아니었겠는가만 금번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국군(國君)이 사직의 의리가 있으나 어찌 말을 하겠는가. 최근 사론(士論)이 분발하여 모두 그대를 영수로 모시고 일어나기를 권하려고 안병찬과 임승주(林承周)가 앞으로 나가서 예를 바치려고 하니, 모름지기 이들과 더불어 상의해 결정하시고 속히 거사하여 때가 늦었다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찍이 을미년의 일은 그대에게 먼저 통지하지 못한 것을 피차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으니, 이것이 전감(前鑑)이 되지 않겠는가. 빨리 도모하면 공사(公私)가 심히 다행이겠다.’

이처럼 이설(李偰)은 안병찬·임승주와 함께 민종식에게 항일의병 대열에 참여해 이를 선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민종식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자 거사 계획은 구체화되어 갔다. 마침내 안병찬·박창로(朴昌魯)·이세영(李世永) 등이 1906년 2월 하순 청양 정산의 천장리(天庄里)에 있던 민종식의 집에 모여 거사 절차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약 보름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뒤 3월 15일경 광시(光時)장터에서 거의하였던 것이다. 이때 모인 의병의 규모는 300~6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병의 편제는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종사관 홍순대(洪淳大), 중군사마(中軍司馬) 박윤식(朴潤植), 참모관 박창로(朴昌魯), 군사마(軍司馬) 안병찬, 유회장(儒會長) 유준근(柳濬根), 운량관(運糧官) 성재한(成載翰) 등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거의 과정과 편제로 볼 때 홍주의병은 을미 홍주의병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박창로·안병찬·채광묵·이세영 등의 핵심인물들이 역시 을미 홍주의병을 주도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 이설의 묘소.

한편 이설은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의진에는 합류할 수 없었다. 이설은 홍주의병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무렵인 5월 22일(음 4. 29) 세상을 뜬다. 경무청에서 풀려나 중병으로 신음하면서도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뉘집 의려가 홍주 동쪽으로 향하나 (誰家義旅赴洪東), 이 이가 지난날 목 찌른 의사로구나 (云是當年刎頸公), 세상 사람들이여 가만히 웃지를 마라 (可笑時人休竊笑), 앉아서 좋은 말만 한들 무슨 공이 있으리오 (座談龍肉有何功)’라는 시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주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암 이설의 고택이었던 ‘하허당(何許堂, 구항면 오봉리 163번지)’의 흔적은 오간데 없이 바뀌었고, 지금은 월남참전유공자인 집 주인 박명순 씨가 그의 터전을 이어오며 복암의 정신을 잇고 있는 듯 했다. 다만 새로 지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과 집 앞에 100년 세월을 넘긴 듯한 향나무, 집의 옆과 뒤쪽에는 수령 수백 년은 되었음직해 보이는 느티나무 몇 그루가 돌담을 감싸며 복암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홍성군은 홍주의병의 정신사적 터전이며 홍주의병의 산실격인 ‘하허당(何許堂)’과 뒤쪽 산비탈에 자리한 복암 이설(李偰)의 묘소 등에 대한 안내간판 하나 만들어 놓지 않았다. 과연 무엇으로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 복암의 의기는 그 어디에서 찾겠다는 말인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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