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패퇴 의병 해미읍성 거쳐 줄포에서 항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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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패퇴 의병 해미읍성 거쳐 줄포에서 항쟁 계속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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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6>
▲ 1990년대 초 줄포항 모습. 이미 뱃길이 끊긴지 오래고 중선배 잔해만 갯벌에 묻혀 있다. 줄포항은1966~1967년경 폐쇄됐다.

홍주성전투 전사 의병 홍주성 밖으로 옮겨 어느 한 곳에 매장
해미관아의 관원들 모두 의병에 가담했을 정도로 적극성 보여
민종식 창의대장, 창의대장소 해미읍성으로 옮기고 재기 노려
해미읍성 의병일행 광천 옹암포에서 배를 구해 전라도 줄포로


 

일본군은 1906년 5월 31일(음력 윤 4월 9일) 새벽 2시 30분경 총공격을 감행해 이날 새벽 4시경 홍주성을 완전 점령했다. 의병과의 1시간 30분에 걸친 전투 끝에 거둔 결과였다. 이후 일본군은 숨어 있는 의병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이때 사망한 의병의 숫자는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912년 동경의 연산당에서 펴낸 ‘조선최근사(朝鮮最近史)’에는 약 80여명으로 기록돼 있으며, 부상자에 대해서는 기록돼 있지 않다. 아무튼 전사한 의병들의 주검은 홍주성 밑의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고, 흙을 살짝 덮어놓은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주민들 누구도 주검에 접근할 수 없었고, 홍주성 주변의 주민들도 대부분 인근의 산이나 골짜기로 피신한 상태여서 주검을 수습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초여름의 날씨에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민종식 해미읍성에서 다시 의병봉기 계획
이렇게 전사한 의병들은 당시 선유사로 파견돼 있던 윤시영 홍주군수에 의해 홍주성 밖으로 옮겨져 어느 한곳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버려져 있던 주검 가운데 수습된 숫자는 최소 15명이며, 이틀간 묻은 숫자가 83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윤시영 군수의 ‘홍양일기(洪陽日記)’에 ‘윤 4월 17일, 일찍 민부(民夫)를 내어 죽은 사람을 옮겨 묻으니 어제 찾아 묻은 자와 합하여 83명이었다. 당일에도 목 잘린 자를 15명 찾았는데, 혹시 결성(結城)·서산(瑞山)사람이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홍주성 주변사람들 보다는 결성이나 서산지역에서 출병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윤 군수는 6월 5일(음력 윤4월 14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방을 붙여 ‘이번 홍주성 함락 때 죽은 사람을 오는 17일(음력) 다른 곳으로 옮겨 묻고자 하니 시친자(屍親者)가 있으면 그날 이른 아침에 성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시체를 찾아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홍주성 주변의 주민들에게 친인척이 전사자 속에 포함됐으면 가족이나 친인척이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 통감부에서 홍주성 함락사실을 본국에 보고한 전보.

한편 홍주성이 함락되면서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거의 100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대부분 홍주성의 옥에 갇혔고 상투에는 이름과 죄목을 쓴 종이쪽지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차례로 불려 나와 일본 순사나 헌병에게 심문을 당했다. 잡힌 의병들의 신분은 대부분 이름 없는 민중들 이었고, 이 가운데 10여명의 의병 수뇌부도 끼어 있었다. 윤석봉, 남규진, 유준근, 이식, 신현두, 문석환, 신보균, 최상집, 안황식 등이 그들 이었다. 이들은 심문과정에서 조선인 심문인의 보살핌으로 30여명은 풀려났다. 윤 군수는 옥에 갇힌 의병들에 대해 “옥중에 들어가 살펴보니 74명이고 모두 하등인(下等人)이었고, 조금 똘똘한 자는 10명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예사(禮使) 손영만(孫營萬) 부자도 옥중에 갇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포로의병들은 6월 7일 일본군 주차군 사령부가 있는 서울 남대문수용소로 이감됐다. 1906년 6월 8일자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은 ‘압송·이감된 포로의병을 90여명’으로 보도하고 ‘이들 의병을 그들의 군율에 따라 포로로 취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군율에 따르면 ‘의병과의 싸움을 그들은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홍주성이 일본군에게 실함된 뒤 성을 빠져나간 의병들은 어떻게 됐을까. 의병들은 홍주성을 빼앗긴 뒤에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대오를 정비하여 두 부류로 응집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한 부류는 홍주성에서 20여㎞ 떨어진 해미읍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창의대장 민종식 일행이었으며, 운집한 의병의 숫자도 수백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6월 8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잔여의병 기백명이 또 다시 해미읍성에 웅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도는 윤시영 군수의 ‘홍양일기(洪陽日記)’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홍주성을 점령했다가 패퇴한 의병 대다수가 해미읍성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민종식은 해미읍성에서 다시 의병봉기를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흔히들 홍주성이 함락 당할 당시 창의대장 민종식이 도망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해미읍성에 집결한 의병의 수뇌부가 민종식 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06년 6월 30일자 ‘만세보(萬歲報)’의 ‘홍주의병후문’이란 제하의 보도에서 해미읍성으로 이동한 의병들을 민종식이 주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에서도 알 수 있다. 만세보는 ‘향일 홍주에서 패주한 의병들이 해미군으로 취합한다더니 다시 들은 즉 그 일당들이 전라도로 도주하였다가 최익현이 체포돼 서울로 온 뒤에 또 다시 도주하여 은밀히 정산군 등지로 모이는 정보가 있는데 민종식의 지휘라 하는 설이 있더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

■해미읍성 일본군과 관군으로부터 안전지대
왜 민종식 의병대장은 해미읍성으로 향했을까. 해미는 민종식 등 홍주의병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지역이다. 해미에서는 관아의 관원들이 모두 의병에 가담했을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으며, 해미관아의 양곡이 홍주성에 입성한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될 정도였다. 민종식 대장은 홍주성을 점령했을 때, 이미 해미군수에게 의병들의 군량미를 대도록 허락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민종식은 군량관 박두표(朴斗杓)를 해미에 파견했다. 당시 해미군수는 해미읍성을 비우고 도망갔으며 창고의 군량미를 수습하던 중 홍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렇게 홍주와 해미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아 민종식은 해미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해미관아의 이러한 적극성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06년 7월 7일자 ‘만세보’에는 ‘해미관아는 여히 총원이 거개비도(의병)에 참여한 증거 흔적이 있으므로 치안유지를 위해 군 관아에 있는 병기를 일시 압수하는지라’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해미는 의병을 추격하는 일본군과 관군의 진행노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홍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은 서울~천안~예산을 거쳐 왔고, 또 다른 부대는 전주에서 출동했기 때문이다. 정부군도 공주에서 파견됐기 때문에 홍주성을 향하는 마당에 해미를 거칠 리는 만무했던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홍주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북쪽과 남쪽, 동쪽 방향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홍주성을 향해 돌진했다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미읍성은 일본군과 관군으로부터 안전지대로 손색이 없었던 것도 작용한 측면이 강한 곳이다.

아무튼 민종식은 창의대장소를 해미읍성으로 옮기고 재기를 노렸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분석되는 대목이다. 민종식의 재기 의욕과 함께 지역의 민중들도 의병재기에 적극 동참하는 분위기 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1906년 6월 5일자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의 보도에 의하면 ‘홍주파견군대 다나까 소좌가 군사령부에 보고하기를 각지에 흩어진 비도(의병)는 멀리 가지 않고 홍주를 회복한다고 떠벌이고 있다고 한다. 양민 가운데에는 그에 감응하는 자가 있으며, 그에 따라 작금 기병 및 보병소대를 각 가도에 파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민종식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뿌리칠 여력이 없어 얼마 되지 않아 해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실제로 공주에서 파견된 청주진위대 소속 정부군이 소대장 이우영(李愚永)의 지휘로 서산과 태안 쪽의 의병을 뒤좇았기 때문이다. 정부군은 홍주성과 주변고을을 평정하자 6월 6일(음력 윤4월 15일) 이우영의 지휘로 30여명이 덕산을 거쳐 면천과 당진으로 진격한 뒤 서산과 태안지역까지 훑었기 때문이다. 또 청주진위대 홍주파견지휘관인 이기홍도 같은 날 70여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남포를 돌아 공주로 갔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민종식 의병 일행은 해미읍성을 빠져 나와 광천 옹암포 포구에서 배를 구해 전라도 줄포(茁浦)로 향한다. 이후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의 포구 일원에서 계속해 일종의 유격전을 벌인다. 이들은 이곳의 일인상가(日人商街) 및 거류지 등을 습격하고 부안, 흥덕, 고창 등지에서 군대주둔소를 공격하는 등 의병항쟁활동을 계속해 이어 나갔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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