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양반가옥의 전형, 300여년 된 명재 윤증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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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양반가옥의 전형, 300여년 된 명재 윤증고택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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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9>
▲ 명재 윤증고택 안채 전경.

명재고택, 노성산 남쪽기슭 노성향교·궐리사와 나란히 위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상류층 양반가옥의 형태
으리으리한 문도 경계 나누는 담도 없는 개방적 공간 특징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 장류를 상품화, 지역의 특산물 양산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명재고택은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4년)의 고택이다. 사람들은 명재 윤증을 ‘백의정승’이라고 불렀다. 숙종임금이 대헌사, 우참찬, 좌의정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효행과 학문에 열중하기 위해서 끝까지 사양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은 우암 송시열의 사문(師門)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노론의 영수인 우암과 서로 첨예하게 맞서기도 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는 원인이 됐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이 됐던 장본인들이다. 당시 우암은 ‘회덕(懷德)’에, 명재 윤증은 ‘니산’(노성·尼城)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 집안에서 내려오는 장류를 상품화하기 위한 장독대 전경.

■자연현상에 대비한 주생활공간의 지혜
명재고택은 노성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는 인근 교촌리의 노성산 남쪽 기슭에 노성향교, 노성 궐리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 숙종 대에 건립돼 후대에 수리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안채와 사랑채가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멸실되었던 사당은 지난 1983년 복원됐으며, 수차례에 걸쳐 안채와 사랑채, 담장과 석축, 연지 등을 보수,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윤증 선생 고택’이라 했으나 2007년 1월 윤증 선생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 전형적인 충청지방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배치는 명재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옛 선조들의 건축적 지혜다. 특히 수납공간인 광채를 안채와 비껴서 배치함으로써 비, 바람, 햇빛 등 자연현상에 대비한 것은 주생활공간의 세련된 지혜다. 명재고택은 윤증이 팔순을 맞은 1709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증의 호를 딴 가옥이지만, 윤증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 가끔 들르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윤증이 이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어떻게 평가하고 사용했는지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 3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명재고택은 전통적인 사상인 풍수가 완벽하게 반영돼 있다. 풍수는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바람을 품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또 다른 입지 원칙인 배산임수 역시 명재고택과 부합한다. 길지의 필수 조건이라 할 만한 남향도 지켜졌다. 명재고택에는 일상에 필요한 물과 바람, 햇볕을 슬기롭게 이용하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윤증고택 입구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지난 2008년 10월 이곳을 방문했다가 기념식수한 토종 ‘꽝꽝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외국인을 포함해 연간 2~3만 여명이 이곳을 다녀간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고택의 가치는 무엇일까를 되묻게 한다. 명재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진 상류층 양반가옥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고택 뒤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낙락장송들이 세월의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고택의 앞에는 400여년 세월의 느티나무와 배롱나무, 자귀나무가 ‘명당의 중심에는 물이 있다’는 말처럼 노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아두는 저수지로 쓰였다는 직사각형의 연못을 지키고 있다. 또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의 온도를 낮춰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연못과 집 사이에는 끊임없이 물을 대는 수로와 우물이 있어서 지수(池水)가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바로 옆에는 300여 년 동안 집안에서 전수돼 왔다는 넓은 장독대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듯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 명재고택 안채 마루에서 본 장독대.

■으리으리한 문도, 경계 나누는 담도 없다
논산 명재고택은 이산(尼山)이라고도 불리는 노성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의 남사면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집 전체의 평면 구성 형태는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룬 ‘ㅁ자’형의 고택이다. 사당은 가옥의 뒤편 동쪽의 경사지에 복원하여 별도의 공간으로 배치했다. 사랑채의 앞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으며, 마당의 왼쪽으로 우물과 연못이 조성돼 있다. 사당은 멸실되었던 것을 지난 1983년 도비와 시·군비를 보조받아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의 전퇴를 둔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재철 명재고택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명재고택은 가장 높은 위치에는 신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안채는 높지 않은 기단 위에 1고주 5량가 구조로 사랑채와 거의 같은 양식이다. 북쪽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두었는데 대청은 제사를 위한 제청과 초례청, 가족모임 장소가 되기도 한다. 뒤편 좌우에 각각 고방(庫房)을 두었다. 고방 앞면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둔 것이 특징적이다. 대청의 서쪽으로 2칸의 안방과 1칸의 윗방을 두었으며, 그 남쪽으로 넓은 공간의 부엌을 두었다. 부엌의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했다. 대청의 동쪽에는 안방보다 작은 면적의 건넌방을 2칸 두었으며, 그 뒤편으로 윗방을 1칸 두었다.
 

▲ 명재고택 사랑채 전경.


또한 건넌방 남쪽으로 1칸 반의 다락이 있는 부엌을 두었다. 안채의 남쪽에 위치한 대문채는 2칸의 중문칸과 서편의 행랑방 1칸, 동편에는 광으로 사용되고 있는 2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사랑채와 ‘ㄱ자’로 연결된다. 대문이 별도로 없는 집의 구조상 중문을 대문으로 겸하되, 대문이 열렸을 경우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자벽을 두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완충 장치로 활용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오른쪽 앞뒤 2칸에 대청을 두었다. 왼쪽 앞뒤 2칸에 누마루를 두었으며, 중앙에는 2×2칸 규모의 온돌방을 만들었으나 앞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서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뒤에 반 칸의 고방(庫房)이 있으며, 누마루 후면으로는 1×2칸의 방이 꾸며져 있어, 대문 옆의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결되고 있다. 가구 구조는 공포가 없는 민도리로, 퇴고주를 세워 퇴량(退梁)과 대들보를 걸었으며, 종량 위에 있는 제형 대공에서는 뜬창방을 볼 수 있다. 또 논산 명재고택의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형상화한 방지의 형식으로 내부에 원형의 섬을 조영하였다”는 설명이다.

명재고택에는 으리으리한 문도, 경계를 나누는 담도 없다.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는 풍류를 즐기기 좋도록 개방적으로 건축됐다. 하지만 안주인이 거주하는 안채는 상당히 폐쇄적이다. 문간채 앞에 서도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에둘러 들어가야 하는데, 벽은 아랫부분이 30㎝쯤 트여 있다. 안채 대청에 앉아 있으면 이 틈으로 손님의 신발이 보인다. 신발의 종류와 깨끗함을 통해 객의 지위와 상태를 유추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명재고택은 윤증 선생 13대손이며 고택의 소유주인 윤완식 부부가 지키면서, 윤증 집안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 장류를 상품화하여 지역의 특산물로 양산하기 위한 장독대들이 사랑채의 오른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현재 명재고택에서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에서는 전통가옥 숙박 체험이 가능하도록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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