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아빠로 존경받는 데이빗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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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아빠로 존경받는 데이빗 송
  • 취재=허성수/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4.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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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홍성 사람, 다문화 가족 만세 <1>

광천에서 12명의 아이들 입양한 호주 출신 구세군 선교사
아이들이 만들어준 문패 앞에서 행복한 표정의 데이빗 선교사.

직접 낳지도 않은 아이를 12명이나 입양해 친자식처럼 기르는 사람이 있다. 데이빗 송(63), 멀리 호주에서 온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거나 해체된 가정의 자녀들을 거둬 자신의 자식으로 삼았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는 독신남으로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한 양부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한 일이라고 고백하는 사나이다. 

지난달 23일 광천읍 신랑2동 서해삼육고 부근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ㄱ자 형태의 오래 된 한옥이었다. 7년 전 사서 수리해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만든 보금자리로 방마다 침대가 있었고, 자개농과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어른들이 쓰던 문갑 등의 고가구도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싫증나 버린 골동품을 외국인이 잘 모셔놓고 아껴 쓰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방을 두루 보여줬는데 침대에 인형이 잔뜩 쌓여 있는 모습이며 아이들이 영어와 한글로 적은 기도문과 직접 그린 그림,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놓은 벽을 가리키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기른 자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딸은 44살, 강원도 원주로 시집을 보내 지금 잘 살고 있다. 그 아래로는 미국에 유학을 보낸 아들과 천안에서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둘 다 20대다. 그 밖에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들로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가장 어린 딸이 6살로 요즘 한창 귀염을 받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막내딸의 동영상을 두세 번이나 보여주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는 왜 먼 이국 땅에 와서 혈연관계도 전혀 없는 아이들을 입양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고 있는 걸까? 답은 그가 가진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자신도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아버지가 되어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14살 때 태권도를 배우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됐다. 한국에는 2005년 거의 50살이 된 나이에 구세군 선교사로 들어왔다. 그는 광천읍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한편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원어민 영어교사로도 활동했다. 어린이들의 친구가 된 그는 가정이 해체되면서 버려질 운명에 처한 아이들을 숱하게 만났다. 그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결국 그들을 직접 기르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그에게 입양된 아이들은 그를 최고의 아버지로 존경한다. 데이빗은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다. 친자녀를 가진 아버지들이 보고 배워야 할 만큼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기 때문이다. 하루 세 끼 똑같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줄 수 없어 한식부터 일식, 중국식, 이태리식, 멕시코식, 서구 유럽의 다양한 음식을 다 섭렵했다. 운동도 좋아해 태권도는 5단, 합기도가 2단이다. 또 검도와 궁도도 배우고 있다. 기타와 드럼도 배우고 있지만 예능분야는 재주가 좀 모자란다고 수줍게 웃으며 고백했다. 데이빗은 아이들을 바르게 기르는 것 외에는 박사학위도, 큰 집도, 최신 스마트폰도, 돈도 필요 없단다. 단, 돈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 지금도 적잖은 돈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 조달하는지 궁금했다.

“호주에서 2명의 후원자로부터 매달 65만 원씩 받고 있어요. 사실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하죠.” 데이빗은 호주에 있는 집과 땅을 다 처분했다고 했다. 남은 삶을 한국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보낼 생각이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투표권이 있는지 물어보니 안타깝게도 없다고 했다. 비자를 2년마다 갱신하는 방법으로 살고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여성과 결혼하는 것이다. 기자가 아름다운 여성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니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아이들에게 쏟아 부어야 할 사랑을 다른 곳으로 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에서 얻은 성이 송(宋) 씨여서 자녀들의 성이 다 같은 줄 알았더니 친아버지들의 성을 따라 다 달랐다. 유난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한국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저의 꿈은 대천 바닷가에 땅을 마련해 2~4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입니다. 제가 죽으면 집은 아이들에게 남기고 한 줌의 재로 저는 바다에 뿌려졌으면 합니다.” 그는 진정 한국 아이들을 사랑하는 최고의 아빠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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