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늦었으나 예쁜 딸 얻어 행복한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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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늦었으나 예쁜 딸 얻어 행복한 3대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5.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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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홍성 사람, 다문화 가족 만세 <3>

김상진·다랏트 부부
최근 홍성군으로부터 효부상을 받기도 한 다랏트 씨 가정.

김상진(55)·다랏트(55) 씨, 두 사람 다 동갑내기로 나이 42살에 만나 결혼했다. 늦은 나이에 첫 임신은 실패했지만 그 다음 해에 가진 아기는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지금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10살이다. 기자가 이들 부부의 가정을 방문한 날 딸 호연이와 어머니 이광예(83) 여사도 자리를 함께 했다. 광천읍 광천천 건너 원촌마을에서 삼대가 함께 산다. 그러나 이 여사는 처음에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시동생이 태국 처녀가 평택에 있다고 해서 같이 가 봤는데 나이가 너무 많았어요. 손주를 못 볼 것 같아 싫었죠. 그런데 아들이 선을 한번 보고 와서는 자꾸 호감이 가는지 자식이 안 생겨도 둘이 재미나게 살고 싶다며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이 여사는 기왕이면 매우 젊은 며느리를 봤으면 싶었으나 아들 상진 씨가 굳이 다랏트 씨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해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그 후 기대하지 않았던 임신도 했다.

“시집와서 1년이 돼 아기가 생겼으나 잘못돼 낳지 못했어요. 나는 기대를 안 했는데 다시 1년 후 딸을 낳는데 성공했어요.” 그 때 아들 내외의 나이는 44살이었다. 이젠 예쁜 손녀를 얻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엄마가 한국말을 못 해도 할머니가 늘 곁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 호연이는 지금 똑순이가 됐다. 엄마 다랏트는 아직도 한국말을 겨우 알아듣고 더듬거리며 대화하는 수준이다. 이 여사가 처음에는 아들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막상 며느리로 맞이한 후에는 다랏트 씨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이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가르치며 도왔다.

“내가 처음에는 다 가르쳤어요. 시장도 같이 가서 물건도 사고… 늘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 줬죠. 내가 하는 대로 보고 잘 배우더군요. 말이 안 통했지만 눈치로 배우더군요.” 답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 여사는 외국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썼단다. “외국에 와서 살려고 애쓰는 게 안타까웠어요. 우리도 자식이 미국에 가서 살면 얼마나 어렵겠나 생각하면서 구박 안했어요. 며느리도 나를 따라주려고 애썼죠.”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문화 고부갈등 문제는 이 집안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모두 같이 마주앉은 자리이긴 하지만 다랏트 씨도 처음 시집살이를 할 때부터 어려운 점을 못 느꼈다고 한다.

“결혼생활 처음 시작할 때 안 어려웠어요. 엄마랑 같이 일했어요.” 그녀가 어렵게 발음하며 대답했다.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에 온 것은 오로지 결혼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태국에서 일찍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는 인기가 없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혼기를 놓친 이유는 두 동생들 때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실상 그녀가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혼자 벌어서 여동생과 남동생을 모두 교육시키며 뒷바라지하는 동안 훌쩍 40을 넘기고 말았다. 마침 어떤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결혼을 위해 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틈에 끼어들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나이에 한국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진 씨가 그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생연분 만난 상진 씨 때문에 가까스로 노처녀 신세를 면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고, 처녀 때 뼈 빠지게 벌어 공부시켜줬던 두 동생들도 고국에서 번듯한 직장을 잡아 잘 살고 있다.

지금 여동생은 휴대폰회사에 다니는데 현장 노동자가 아니다. 다랏트 씨는 여동생이 ‘세크러터리’(secretary)라고 영어로 발음하며 애써 강조했다. 비서일 수도 있고 광범위하게 사무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하고 취업한 것만은 분명했다. “남동생은 마트 직원으로 근무하고 오빠는 맥주공장에 다녀요.”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동안 고국에는 두 번 갔는데 그 후 6년이 지났다. 딸이 4살 때 데리고 갔는데 정작 호연이는 그 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이 여사는 남편이 70살에 너무 일찍 떠나면서 홀로 남게 됐을 때 서울에 갔던 아들 상진 씨가 돌아와 거의 20년을 같이 살고 있다. 지금은 네 식구로 불어난 가운데 팔순이 넘은 이 여사는 어린 손녀 때문에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치매나 우울증이 파고들 틈이 없다. 상진 씨는 여전히 성실한 가장으로서 식품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랏트 씨도 매일 김공장에 출근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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