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형무소에서도 당당했던 ‘민족독립의 자존심’
상태바
만해, 형무소에서도 당당했던 ‘민족독립의 자존심’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6.24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2>
옛 경성감옥인 만해가 수감생활을 한 서대문형무소.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만해 3·1운동 민족 대표들에게 옥중 투쟁 3가지 원칙 제안·주장
일본인 검사 심문에 만해, “조선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 주장
만해, 옥중서 지조 지키고 재판에서 의연히 독립사상 마음껏 개진
철창마저 수행처로, 만해의 담대함·당당한 기개 후세들 본받아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픈 민족사의 굴곡을 간직하고 있다.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후 80여 년 동안 약 35만 여명을 수감하며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민주화운동인사·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됐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1998년 사적(史蹟) 제324호로 지정됐다.

이제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아픈 민족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이곳에서 3년여의 수감생활을 하면서 몇 차례 고문을 받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시설도 열약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멘트 바닥에서 더운 여름과 차디찬 겨울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열약한 시설과 악형으로 몇몇 대표는 생을 등지기도 했다. 실제 박준승은 고문으로 옥사했으며, 손병희는 옥중에서 생긴 병환으로 출감 후 숨졌다.

■ 만해, 옥중 투쟁의 세 가지 원칙 제시
실제로 만해 한용운은 3·1독립운동 민족 대표들에게 옥중 투쟁의 3가지 원칙을 제안·주장했다고 한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는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는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다.

만해가 옥중 투쟁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 이유는 ‘내가 내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변론을 할 이유가 없고, 호의호식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어서 사식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 법률에 따라 보석 신청을 하는 것도 맞지 않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일본인 검사의 심문과 이어진 재판에서도 만해는 조선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해가 법정에 설 때면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한다”며 “우리들의 행동은 너희들의 치안 유지법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죄가 성립될는지도 모르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독립의 정당성을 갈파하곤 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민족대표 일부를 내란죄로 몰아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때에도 만해는 오히려 당당했다고 한다. 소식을 접한 일부 인사는 감옥에서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해는 오히려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고 호통을 쳤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일화는 천도교 측 민족대표 이종일의 ‘묵암 비망록’에서 당시 스님의 호통을 “통쾌무비한 일”이라며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는 젊은이”라고 회고했다.  여타의 민족 대표들과는 전혀 다른 당당함과 기개를 보여줬다는 것은 상좌 이춘성 스님의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절에서 무엇을 만들어서 가지고 면회를 가면 ‘이것은 뭐 하러 가져왔느냐. 내가 아홉 귀신 먹다 남은 것을 먹을 줄 알았느냐’고 내던지기 일쑤였다는 것. 감옥의 간수들도 ‘저 중이 제일 간 큰 놈이지. 저 놈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어’라고 저희들끼리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 만해의 높은 기개 ‘철창 문학’으로 승화
만해의 높은 기개는 형무소에서 지은 한시와 시조에서도 나타난다. 만해는 수감 기간 동안 13편의 한시와 시조 1수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위 ‘철창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옥중에서 수많은 시대의 명작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사마천은 옥에 갇혀 궁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라는 역사를 남겼고,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서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창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만주 뤼순 감옥에서 ‘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다 옥사했다.
평소 깨달음을 추구한 수행자이면서 유교와 서양철학·문학에도 이문이 밝았던 만해는 옥중 생활동안 창작활동을 이어갔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해는 형무소에서 한시와 시조를 통해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노래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도 좋네 그려(山鸚鵡能言語)
그 새보다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愧我不及彼鳥多)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雄辯銀與沈默金)
그 금으로 자유의 꽃을 몽땅 사리라(此金買盡自由花)

이 ‘옥중에서 읊다(獄中吟)’라는 제하의 한시는 옆방 동료와 이야기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2분여 동안 손이 묶이게 된 이후 읊은 즉흥시라고 전해진다.

이 한시에 대해 동국대 김광식 교수는 “여기서 스님은 말 잘하는 앵무새, 웅변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회유 간섭을 거부하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다”면서 “이는 저항의식을 보여준 것으로 저항의식은 독립을 갈망하는 의지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이 같은 담대한 정신과 행적에서 만해 스님의 옥중 독립운동은 살아날 수 있었다”면서 “서대문형무소의 항일 투쟁은 출옥 이후 지속적인 항일 운동의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했다. 만해 한용운의 항일정신은 그가 옥중에서 풀려 나온 사실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1921.12.24)에서 읽을 수 있다.

만해의 석방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1921.12.24).


‘地獄에서 極樂을 구하라…한용운씨 옥중 감상’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이십이일 오후에 경성감옥에서 가출옥한 조선불교계에 명성이 높은 한용운(韓龍雲)씨를 가회동으로 방문한즉 수척한 얼굴에 침착한 빛을 띠우고 말하되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올시다. 내가 경전으로는 여러 번 그러한 말을 보았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인데 다른 사람은 어떠하였는지는 모르나 나는 그 속에서 쾌락을 지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을 무서워 하야 구차로히 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비루한 데에 떨어지고 불미한 이름을 듣게 되나니 한번 엄숙한 인생관 아래에 고통의 칼날을 받는 곳에 쾌락이 거기 있고 지옥을 향하여 들어간 이후에는 그곳을 천당으로 알 수 있으니 우리의 생각은 더욱 위대하고 더욱 고상하게 가지어야 하겠다”고 한용운 씨는 일류의 철학적 인생관을 말하야 흐르는 물과 같음으로 다시 말머리를 돌리어 장래는 어찌하려는냐 물은즉 “역시 조선불교를 위하여 일할 터이나 자세한 생각은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한용운의 옥중투쟁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은 결과였다. 만해는 옥중에서, 지옥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을 체감했던 것이다. 고통의 칼날을 기꺼이 수용하고, 지옥을 향해 걸어 간 행보였다. 이러한 담대한 정신과 행적에서 만해의 옥중 독립운동은 계속 됐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서대문형무소에서의 항일투쟁은 철창체험으로 승화돼 출옥 후 지속적인 항일투쟁의 원동력으로 전개됐다.

만해는 옥중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옥중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의연히 자신의 독립사상을 마음껏 개진하고, 3·1독립운동의 정당성과 명분을 분명하게 언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만해의 옥중 투쟁은 자신의 독립운동의 지속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3·1독립운동사, 민족운동사에서도 민족대표로서의 위상과 절개를 유지했던 것이다. 철창마저 수행처로 알던 만해 한용운의 담대함과 당당한 기개도 후세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임에 분명하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