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인조의 피신처 공산성, 광복루는 백범이 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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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인조의 피신처 공산성, 광복루는 백범이 작명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6.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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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4>
백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공산성은 왕들의 피신처로 삼을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곳이다.

공산성, 백제시대 토성이었던 것 조선시대 석성으로 다시 쌓아
토성 735m, 석성 1925m 고대 성곽, 해발 110m 능선에 위치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난 온 백제의 수도
왕의 피신처가 될 만큼 전략적 군사거점이었고 천연요새 역할


충남 공주를 지나가다보면 금강 건너편에 길게 이어지며 성곽이 보인다. 특히 밤에 지나갈 때면 색색의 조명을 받아 멋진 광경을 연출하는데, 이곳이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이다. 공산성은 우리나라에 남은 성곽 유적 중 전체를 온전히 보존된 웅진백제시기(475~538)의 성곽(왕성)이기도 하다. 공산성은 패망한 백제의 유물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그 전략적 가치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증·개축 되면서 계속 사용됐다. 그래서 그곳에는 우리나라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기도 하다. 지금은 주민들의 쉼터로 거듭난 공산성이지만, 백제 역사를 생각하면서 바라본 공산성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공주시 웅진로 280에 위치한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년(475)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했다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공산성은 총 연장 2660m(토성 735m, 석성 1925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등이 남아 있다. 동문인 영동루(迎東樓)와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복원했으며 금강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금강을 바라보며 산책을 할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공산성에서는 계룡산과 차령산맥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 고려시대 안렴사(지방장관)이 공산성에 올라 탁 트인 광경을 보고 어깨춤을 췄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고 있다.

■ 공산성, 처음 축조될 때는 토성

공주 공산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대략 4~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압박을 받은 백제의 문주왕은 한강을 따라 마련된 수도를 버리고 멀리 이곳 공주까지 내려왔으니 얼마나 비통했을까. 이후 성왕이 제2의 부흥을 계획하며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4년간 공산성은 백제의 중심이 됐다. 이후에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공산성은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다가 소멸해 고려의 군사 거점지로 계속 사용됐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지역 요충지로써의 역할을 했다. 1623년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오기도 했다. 그러면 공주는 왜 백제의 수도가 됐을까?

광개토대왕의 활약으로 대륙을 석권한 고구려는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남하정책이 시작된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성을 58개나 빼앗기며 한강 이북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된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의 북성과 남성을 차례로 공략했고, 이 전투에서 백제는 개로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고구려군이 한성을 완전 점령하지 않고 한강 이북으로 철수했지만, 백제는 한성을 더 이상 지키기가 어려워 천도를 단행한다.

그렇다면 왜 공주인가? 이는 당시 담로라는 백제의 권력 체계 때문이다. 전사한 개로왕에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즉시 천도를 결심하는데, 그 곳이 바로 충남 공주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자식이 아니라 공주를 기반으로 한 토호세력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공산성은 언덕위로 펼쳐진 장엄한 성벽과 커다란 성문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곳이 공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금서루다. 지금의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당시 조선 후기에 발간된 공산지 기록과 지형적 여건을 고려했다고 전해진다.

금서루에 오르면 금강이 가로지르는 공주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는데, 금서루는 서문에 해당된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가면 남문인 진남루를 만나게 된다. 진남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길이 모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진남루 위쪽으로는 석축이 없는데, 공산성은 처음 축조될 때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됐기 때문이다.

또 금강변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면 강가에 북문인 공북루가 있다. 공북루는 ‘망북루’로도 불렸는데, 여기서 ‘망북’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즉 임금이 있는 곳을 기린다는 뜻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 역사유적
백제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구성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지난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역사유적으로서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여 년 동안 존속한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반도의 삼국을 이룬 고대국가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도읍들과 연관된 백제 후기(475~660)의 유적으로,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에 분포하는 8곳의 유적을 포함한다. 공주에는 외부 침입을 막는 방어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웅진(현 공주)시대의 왕성인 공산성(公山城)과 무령왕릉을 포함한 웅진시대 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구성된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부여에는 사비시대 왕궁지인 관북리 유적과 왕궁의 배후 산성이자 후원인 부소산성, 고대 동아시아 평지 가람 건축의 원류를 보여주는 정림사지, 도성 밖에 위치한 사비시대 왕릉군인 능산리 고분군, 사비도성을 둘러싼 외곽성인 나성이 포함됐다.

공산성의 누각 중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년) 22년(500년)에 궁성 동쪽에 세운 누각으로 연회장소로 쓰인 곳이다. 1993년에 복원됐는데, 삼국시대 목조 건물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의 목조 건물 양식을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공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다시 축조된 것이다. 현재 석축 약 1.8m, 토축 약 390m로 2중으로 쌓여 있다. 토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쪽 성벽은 성곽 안쪽의 넓은 산책로와 달리 좁고 가파르게 조성돼 있다. 동문루를 지나 좁은 길을 내려서면 진남루(鎭南樓)에 닿는다. 남문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이 모두 이 남문을 같이 썼다고 해서 ‘삼남문’이라고도 불린다.

공주시청 해설사에 따르면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광복루가 위치해 있다”며 “이 건물은 원래 공산성 내 중군영의 문루였는데, 당초 위치도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고 이름도 해상루(海桑樓)라 불렸다. 중군영을 폐지한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해상루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웅심각(雄心閣)으로 바꿨다”고 설명하고 “지난 1946년 공주를 방문해 누각에 오른 백범 김구가 사연을 듣고 조국의 8·15 광복을 기려 광복루(光復樓·문화재자료 제50호)로 바꾸자고 제안했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공산성은 백제가 아닌 고려시대 때 사용된 명칭이다.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 불렸다. 백제의 왕성이지만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다수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곳도 공산성이었고, 통일신라 말기 난을 일으킨 웅진도독 김헌창이 최후까지 항거한 곳도 공산성이었다. 1010년 거란족 침입 당시 고려 현종이, 1623년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피신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주축이 된 금강 방어전의 주 전선도 공산성이었다. 이렇듯 공산성은 백제의 역사가 흐르는 곳, 왕의 피신처가 될 만큼 전략적으로 뛰어난 군사거점이었고, 천연요새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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