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읍성, 국내 최대 사창 발굴·비격진천뢰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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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읍성, 국내 최대 사창 발굴·비격진천뢰 출토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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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7>
복원공사 중인 고창 무장읍성 전경.

무장읍성 1417년 왜구 방어 위해 주민 2만명 동원 4개월간 축조
해자 2127척, 성벽 1470척으로 성벽보다 1.4배 큰 것으로 파악돼
무장읍성 복원공사 15년째, 전국 읍성 건물지 중에 가장 큰 규모
최대 규모 적교시설, 국내 최대 규모 사창건물지(社倉建物址) 발굴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읍성(사적 제346호)’은 지난 1991년 2월 26일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무장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봉기 장소로써 큰 의미가 있으며 길이 1400m에 4만평의 면적에 객사, 동헌, 진무루 등이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 명이 동원돼 4개월간 축조한 곳으로 사적 제346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됐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무장읍성은 행정적인 기능보다 군사적인 거점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한 읍성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무장진은 1417년 왜구 방어를 위해서 전라병영을 광산현(光山縣)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옮기면서 방어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흥덕진(興德鎭)을 부안진(扶安鎭)으로,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게 됐다. 그러나 세종 이후 현감이 파견되면서 무장진은 폐지됐다.

■ 복원 공사 15년째, 국내 최대 사창 발굴
고창군은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재)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에서 지난 2016년 4월부터 발굴조사 중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7차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해자와 최대 규모의 적교시설이 확인됐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1417년(태종 1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해 만들어진 현(縣)에 축조된 것으로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전라도 읍성 중에도 해자가 설치된 곳은 다수가 확인됐으나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규모와 성격이 파악된 곳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종실록 기록을 보면 해자는 2127척, 성벽은 1470척으로 해자가 성벽보다 1.4배 정도 큰 것으로 파악됐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해자는 시기를 달리해 2기가 확인됐고 초기 성벽과 동일 시기로 판단되는 초축의 해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호안석축으로 이뤄진 반면에 옹성 축조 시 조성된 후대의 해자는 자연 굴광면을 이용했다. 초축의 해자는 성벽 기저부에서 5.2∼6.4m 정도 간격을 두고 설치됐으며 폭은 위치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부 4.2∼8.2m, 하부 2.3∼5.3m 정도다. 또 내부에서 적교시설로 추정되는 목주열이 나중에 축조된 옹성의 하부로 연결되고 있다. 호안석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촘촘하게 박은 말목열은 기존에 다른 읍성의 해자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사례로 해자의 축조방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후대의 해자는 초축 해자가 폐기된 후 읍성 내부의 물을 배출하는 배수로 역할까지 병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방어시설로서 해자와 성벽의 간격이 옹성부분에서 절반 정도로 좁혀지는 양상이 일반적이나, 무장현 관아와 읍성의 후대의 해자는 오히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특이한 구조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대 해자에서는 해자를 건너는 적교(吊橋)시설도 확인됐는데 정면 3칸, 측면 2∼4칸의 규모로 직경 30∼40cm 내외의 대형 목재를 2중으로 받치고 있는 교각구조를 하고 있다. 평면형태로 볼 때 중앙부는 마차 등을 이용한 물자 이동로로, 양측면은 사람들의 이동로로 구분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까지 확인된 해자의 적교시설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된다. 최대 규모의 적교시설은 2015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정면 14칸(54.5m), 측면 3칸(11.5m)의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창건물지(社倉建物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등 무장읍성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했다.

또한 무장읍성은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창(社倉, 조선시대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보관하는 곳)터가 발굴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다.

고창군에 따르면 무장읍성 복원 공사가 15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14년 무장 객사 동편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창 터가 발굴돼 전국적인 관심을 끈 곳이다. 무장읍성 발굴 조사는 지난 2014년부터 진행돼 읍성 내부의 사창과 관련된 건물지, 화약고, 군기고 유무, 동쪽 성벽의 진행 방향 등을 파악한 상태다.

특히 사창과 관련된 건물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전국 각 지역의 읍성 건물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무장읍성 주변 경제 규모를 한 눈에 가늠하게 해주고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창 규모는 100평, 정면 11칸 측면 3칸(33m×10m)의 규모로, 화재를 막기 위해 외벽을 석재로 축조한 형식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선원무장읍지(全鮮元茂長邑誌, 1922)’에 의하면 사창은 ‘객사 동쪽에 소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비변사인(印) 방안지도(1739년 이후), 해동지도(1750년대), 여지도(1765년), 광여도(1800년대), 고지도 무장현도(1857년), 무장현도(규장각) 1872년, 전라도 무장현도(19세기) 등 고지도에 기록된 ‘사창’ 건물의 실체가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작은 사진은 발굴된 무장읍성 해자와 적교 시설.

■ 비격진천뢰 출토, 무장읍성축제 개최
“1592년 선조 25년 9월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 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 명이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선조수정실록’ 중에서-
전북 고창군은 지난 6월 14일 무장면사무소 회의실에서 조선시대 신병기인 비격진천뢰에 대한 역사 강좌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는 문화재지역 주민공감정책 ‘다시 찾은 무장읍성’의 일환으로 추진된 4차례의 역사교육 중 마지막 강의였는데, 지난해 11월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에 참여한 호남문화재연구원 임영달 연구원이 강연을 했다.

임 연구원은 지난해 무장읍성 비격진천뢰 최초 발견자로 알려져 있다. 발견당시 벅찼던 소감은 물론, 비격진천뢰가 2019년 우리에게 주는 의미 등을 쉽고 재밌게 설명했다. 생생한 발굴조사 이야기와 함께 영화에서나 막연히 보던 비격진천뢰에 대한 강의를 현장에서 듣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고창군청 관계자는 “무장읍성 발굴단원과 함께하는 강의로 주민들이 지역 문화재에 대해 쉽게 이해하는 자리가 됐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1월에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 중 역대 가장 많은 비격진천뢰(11점)이 출토됐다. 당시 학계와 문화재 관계자들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일반 주민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한편 이에 앞서 고창군은 무장읍성보존회(대표 김기육)에서 기획한 제1회 무장읍성축제를 지난 5월 18일에 무장읍성 일원에서 진행했다. ‘무장읍성 602년 조선시대 과거로 가자’라는 슬로건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무장읍성의 정체성을 정립하겠다는 의도로 진행했다. 특히 지난해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 사진 전시와 발굴현장 공개 프로그램이 진행돼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기회로 이어졌다.

이번 행사는 길거리 퍼레이드를 비롯해 조선시대 병영체험관, 현감부임차 행렬재현, 무예시범단 등을 실시했다. 처음으로 개최된 무장읍성축제에는 관내 심원면을 비롯해 해리면, 상하면, 공음면, 대산면, 성송면, 무장면, 아산면에서 대거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주민 주도형 축제로 기획돼 무장면민들의 주도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축제로 자리매김해 각별한 의미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사)무장읍성보존회 김기육 회장은 “3·1운동으로 계승된 동학농민혁명의 무장읍성 봉기는 지역주민의 긍지이며 자랑”이라며 “5월은 고창의 대표축제인 청보리밭 축제와 연계할 수 있어서 흥행과 역사의 재조명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밝히고 “무장읍성 축제는 지역 간 소통과 화합을 이뤄내는 주민 축제로 첫 출발을 시작한 만큼, 지속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공유하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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