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복원, 정체성 회복·문화관광·지역경제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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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 복원, 정체성 회복·문화관광·지역경제 활성화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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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8>
1993년 남고문 복원을 시작으로 2018년 복망문을 끝으로 25년만에 나주읍성 나대문 복원사업을 완료했다.

나주읍성, 통일신라시대 토성 축조기술 이용해 고려 때 쌓은 판축토성
조선시대인 1404년(태종 4) 10월에 읍성을 고쳐 쌓으면서 돌로 축조해
역사문화도시 위상정립, 역사적 정체성 회복을 위해 1993년 복원 시작
역사문화자원 연계해 독보적인 역사·문화·관광 콘텐츠 발굴, 육성 계획


나주읍성이 품고 있는 역사의 깊이는 넓고도 깊다. 견훤과 왕건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고, 삼별초의 공격과 몽골군의 진군, 임진·정유재란의 환란, 동학농민군의 공세와 항일의병들의 기병 등이 담겨 있다. 역사의 현장이자 유적인 나주읍성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나주읍성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4대문과 성벽, 주요 관공서인 목관아 등의 훼철로 동·서익헌이 뜯기고 가운데 건물만 남은 금성관, 읍내 외곽지역의 야산과 구릉에 성벽의 일부분만이 남아 있는 정도였다. 4대문은 성벽으로 쓰였다가 너무 커서 옮기지 못한 바위들이 점점 흩어졌다. 대체로 기단 부분은 땅에 묻힌 상태로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다만 서성문과 나주고 사이에는 80m 길이의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일반 집들이 성벽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잘 보존돼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성벽 쌓기 기술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됐다는 평가다.

■ 지자체장 홍보·치적 올리기 철저히 지양
나주읍성은 사적 제337호로 서울 도성(都城)과 같이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4대문을 비롯해 객사인 금성관, 동헌(제금헌), 목사내아 관아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전라도의 대표 석성(石城)이다. 전체 둘레 3.7㎞, 면적 97만 2600㎡규모로,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모습은 조선시대 나주로 부임한 목사 김계희(1457~1459)에 의해 완성됐다. 하지만 1910년대 일제 강점기 때 성문은 철거되고, 성벽이 크게 훼손되는 고초를 겪었다.

나주읍성은 통일신라시대 토성 축조기술을 이용해 고려 때 쌓은 판축토성이었다. 조선시대인 1404년(태종 4) 10월에 읍성을 고쳐 쌓으면서 돌로 축조했다. 토성에서 석성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주읍성의 둘레는 3.7㎞로 확장됐다. 나주읍성은 옹성과 함께 문루를 갖춘 4대문이 있었다. 나주읍성 안에는 십자형의 도로가 있어 관아건물을 이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성벽은 대부분 헐렸고 극히 일부만 남았다. 교동에는 서벽(西壁)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돌 크기는 길이 19m, 높이 90~240㎝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을 1×1m 크기의 자연석을 겉면에 놓고 ‘잔돌 끼움 방식’방식에 의해 쌓아 올렸다. 북벽(北壁)의 성돌은 산정동과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에 일부 남아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됐으나 남벽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872년 제작된 나주목 지도를 보면 나주읍성 4개 성문 안에는 여러 관아 건물이 꽉 차있다.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제금헌), 내아, 객사인 금성관을 중심으로 해 서쪽에는 장청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성문(서성문) 밖에는 향교가 있다. 또 동쪽으로는 훈련청과 군기고, 옥(獄)이 위치해 있었다. 북쪽에는 읍창과 향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문(남고문)을 조금 벗어난 곳에는 진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토포청과 이청, 전라우영에 속한 여러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주시의 문화재 복원은 1993년 4대문 중의 하나인 남고문을 시작으로 첫 출발을 했다. 고지도와 역사기록, 발굴을 통한 복원규모 파악, 일제 강점기 사진 등을 활용한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멘트로 기반작업을 하고 전통적인 축성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옹성도 만들지 않은 채 서울 남대문을 모방한 짝퉁 복원으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고지도에는 4대문 모두 옹성(적의 침입으로부터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성벽)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복원사업은 정밀 발굴을 통한 건물규모 추정, 옛 사진과 문헌자료 등의 분석,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건물 설계도 등의 분석과 참조를 통한 설계 및 시공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자체장의 홍보와 치적을 위해 복원속도를 끌어올리는 것은 철저히 지양했다. 그러면서 금성관의 동·서익현과 망화루, 내삼문 등 4대문의 나머지인 동점문, 서성문, 그리고 북망문을 차례로 복원했다. 여기에 목관아가 있었던 금성관 앞(구 매일시장)은 5일시장과 통합해 청동으로 이전하고, 주차장과 공연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으로 사용했다.

■ 4대문 복원 완료, 원도심 활성화에 역점

1872년 제작된 나주목 고지도.

나주시는 나주읍성 성벽의 복원계획을 구체적으로 진행했다. 지난 2015년 6월 서성벽과 동성벽이 추가로 국가사적(483호)으로 지정됨에 따라 서성벽, 동성벽 정비와 복원에 속도를 냈다. 서·동성벽 정비와 복원에 약 300억 가량의 예산이 소요되지만 두 곳이 국가사적이어서 복원사업비의 70% 가량을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동성벽은 남산에서 시작돼 동점문과 국도 1호선을 지나 석당간까지 800여m 구간을 옛 성벽그대로를 복원했다. 서성문에서 시작되는 서성벽은 나주천 옆 우영아파트 앞까지의 800m거리를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다. 또한 주변 정비사업을 통해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산책로 등을 조성했다. 남측 성벽과 북측 성벽은 주거지와 도로 등을 관통하고 있어 주민불편과 예산상의 문제로 나머지 이 구간은 향후 고증을 거쳐 정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 진행했다.

이에 나주시는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위상 정립과 역사적 정체성 회복을 위해 지난 1993년 남고문(南顧門) 복원을 시작으로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해왔다. 이에 2005년 10월 동점문(東漸門)과 2011년 10월에 영금문(映錦門, 또는 서성문)복원을 완료했으며, 2018년 북망문을 끝으로 25년 만에 4대문 복원 사업을 완료했다. 총 공사비 44억 원이 투입된 북망문은 2012년 부지매입을 시작으로 2015년 1월에 착공해 2018년 12월 전통 성문 문루(門樓)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 옹성(甕城) 및 성벽(71m)을 복원했다.

특히 성문의 형식을 놓고 의견 차이로 1년6개월 간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1920년 나주인에 의해 발간한 ‘속수나주지’ 문헌 기록을 통해 성문 형식이 ‘홍예식’(虹霓式)으로 밝혀지면서, 북망문 성문은 곡선 형태의 무지개 모양으로 최종 복원됐다.

4대문 복원 완료에 따라 시는 원도심권 활성화를 위해 역점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읍성권 내 다양한 역사문화자원과 연계해 독보적인 역사·문화·관광 콘텐츠를 발굴, 육성할 계획이다.

강인규 나주시장은 “4대문 복원을 통해 나주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 더 나아가 남도의 역사적 책무를 실천해가는 앞선 도시가 됐다”며 “기적과도 같은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 복원 현장에서, 연구실에서 밤낮 없이 흘린 시민들의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 시장은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한 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는 지속적인 지역발전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역사문화도시 나주를 지켜온 ‘나주정신’을 발휘해 호남의 중심도시 나주라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시재생과 이윤태 정책팀장은 “도심재생에 있어 그 기본이 되는 인구와 먹고 살거리가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나주는 목사고을이란 정체성과 함께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역사문화도시라는 테마로 도시재생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면서 “도심재생은 그 도시만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실현해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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