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불교 승려로 원적을 둔 설악의 신흥사
상태바
만해 한용운, 불교 승려로 원적을 둔 설악의 신흥사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9.24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23>
설악산 신흥사 전경.

선정사 옛터 아래쪽 10리 지점에 절을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함
1912년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말사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부름
한용운, 서여연화와 외설악 신흥사에서 한 때 동거했던 경험이 있어
만해 서여연화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을 긍정해, 이것이 ‘님의 침묵’


설악산은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나뉜다. 외설악에 위치한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 (652년)에 자장율사가 세워 처음에는 ‘향성사(香城寺)’라 불렀다. 이후 여러 차례 불에 탄 것을 조선 16대 인조 22년(1644년)에 영서(靈瑞), 연옥(蓮玉), 혜원(惠元)이라는 세 스님이 똑같은 꿈을 현몽해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신의 계시를 받고 세웠다 해 ‘신흥사(神興寺)’라 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 주조한 1400여 년 된 범종과 조선 순조가 하사한 청동시루, 극락보전(지방문화재 14호), 경판(지방문화재 15호), 보제루(지방문화재 104호), 향성사지 3층 석탑(보물 제443호)과 삼불상, 명부전, 선제루, 칠성각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절 이름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설악의 신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당시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도 함께 지었다. 이 때 자장은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 구층탑이 어느 탑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향성사는 698년(효소왕 7)에 능인암과 함께 불타 버린 뒤 3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701년에 의상(義湘)이 자리를 능인암 터로 옮겨서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 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쳤다. 이 때 의상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3존 불을 조성해 이 절에 봉안했다. 선정사는 1000년 동안 번창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파괴됐고, 1642년(인조 20)에는 화재로 완전히 타 버렸다. 1644년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이 소림암(小林庵)에서 나타난 신인(神人)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3재(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꿨다. 그래서 선정사 옛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했다. 이후 신흥사에는 수많은 불사(佛事)가 이뤄졌다. 1647년에는 대웅전을 건립했고, 1661년(현종 2)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짓고 ‘법화경(法華經)’ 등의 판본을 뒀으며, 1715년(숙종 41)에 설선당(說禪堂)이 불에 타 버리자 1717년에 취진(就眞)·익성(益成) 등이 다시 중건했다.

1725년(영조 1)에는 해장전을 중수했고, 1737년에는 명부전을 창건하고 지장보살상을 봉안했으며, 1801년(순조 1)에는 벽파(碧波)·창오(暢悟) 등이 용선전(龍船殿)을 짓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했다. 1813년에는 주운(周雲) 등이 불이문(不二門)과 단속문(斷俗門)을 세웠고, 벽파 등은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했다. 1821년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했고, 1858년(철종 9)에는 벽하(碧河)·명성(明成) 등이 16나한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서 해장전으로 옮겼다. 해장전의 이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고쳤다. 그 이후 1909년에는 용선전이 헐렸고, 1910년에는 응진전이 불탔으며, 1912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됐다.

1924년에는 설선당 후각(後閣) 32칸을 중수했다. 1965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돼 양광·속초·강릉 등지의 사암을 관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절의 주지를 지냈던 성원(聲源)이 대소의 당우들을 거의 모두 중건 또는 중수했고,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에서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부르고 있다.

신흥사 일주문.


■ 만해, 신흥사에 원적을 두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만해 자신도 ‘삼천리 6호(1930), 나는 왜 중이 되었나’에서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洪州)”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생가 주변에는 만해사당, 만해문학체험관, 민족시비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강원 인제군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이 출가한 사찰이다. 그렇지만 만해는 3·1독립운동 당시 속초시 신흥사에 원적을 두고 승려가 됐다. 이후 만해는 29세에 설악산 신흥사와 건봉사에서 수거 안거를 하며 선을 닦는다.

대설악이 낳은 만해의 기상이 설악을 닮아 늠름하고 설악은 만해를 품어 넉넉한 모습으로 보일 때, 만해 한용운 그 이름 석자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 된다. 대설악의 백담사, 오세암, 신흥사, 안양암, 낙산사, 홍련암 등은 만해 한용운으로 하여금 근대정신이 솟구치게 만든 도량이요, 정신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설악은 만해 한용운의 정신이 끝없는 바다에서 쑥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제일 먼저 맞닿는 곳이요, 만해의 정신이 머무는 역사의 현장이다. 설악이 있기에 만해 정신이 한층 빛나듯, 만해가 있기에 설악이 더 장엄하게 보인다고 한다. 만해를 품은 설악은 침묵 속에서 대자연의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모두 알다시피 설악산 국립공원에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 신흥사가 있다. 가슴 저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의 오세암, 만해 한용운의 출가의 결기와 얼이 배인 백담사도 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백담사와 설악동 신흥사 등 인근의 절집들을 거느린 큰 절이었던 건봉사도 있다. 이러한 가운데 만해 한용운의 나이 47세, 내설악의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고가며 지냈던 1925년은 만해의 인생에게 가장 극적인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 때 만해는 가장 강렬한 두 권의 책을 폭풍우처럼 완성한다. 하나는 6월 7일에 탈고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이고, 다른 하나는 8월 29일 탈고한 ‘님의 침묵’이다. 십현담주해는 선불교의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수행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십현담(十玄談)을 주석한 책이다. 십현담주해를 쓰면서 한용운은 승려로서 가장 강렬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두 권의 책을 쓸 때, 한용운의 곁에는 서여연화(徐如蓮花)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용운이 서여연화와 외설악에 있는 신흥사(神興寺)에서 한 때 동거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대목이다.

어쩌면 한용운이 외설악으로부터 내설악으로 옮겨온 이유도 서여연화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서여연화가 ‘한용운을 승려가 아니라 자꾸 남성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십현담주해는 한용운의 치열한 자기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극진하게 모시는 서여연화로부터 발생한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그래서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자비심을 회복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특정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한용운의 노력은 끝내 좌절된다. 마침내 한용운은 서여연화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을 긍정해버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바로 ‘님의 침묵’이라는 것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용운이 승려로서의 자신의 삶을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관념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님의 침묵’을 통해서 만해는 서여연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해버린다. 그렇지만 만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이자 동시에 불교지도자였던 만해는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리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을 탈고한 뒤, 만해가 ‘군더더기의 말’, 즉 ‘군말’이란 서문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며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은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