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지명역사 1000년, 홍주성 침묵 속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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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지명역사 1000년, 홍주성 침묵 속의 증언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0.07.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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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오목렌즈 세상렌즈]


홍주지명역사 1000년, 그리고 홍주성


오늘날의 도시와 같이 성(城)은 중요한 군사적, 행정적 최소단위였다.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아주는 방어벽인 동시에 '우리'라는 강한 공동체의식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성(城)이었다. 반만년 우리 역사를 통해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된 과정에서도 성(城)은 항상 침묵 속에서 역사의 부침을 지켜본 장본인인 셈이다. 우리 지역의 홍주성(洪州城)도 서해안 국방의 요새로 동학혁명, 을사조약, 일제강점기 등 수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훼손된 역사문화유적을 원형으로 복원, 정비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계승ㆍ발전시키고,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화두로 등장한 상황이다. 동시에 역사ㆍ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는데 대다수 주민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의 방점은 홍주성의 복원사업과 함께 오는 2012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해 오는 해에 홍주지명역사 1000년을 맞는 해라는 역사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성군은 1000년이라는 지명역사의 의미는 물론 충남도청 이전과 맞물린 기념사업 등의 구상도 아직까지는 오리무중이다.

홍주성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으로 성첩이 400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는 백월산 중복에 해풍현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시기에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후 순조 때에 한계수가 수성했다는 기록과 당시 홍주목사 이헌규와 영장 김계묵이 방백들과 의논 순조 23년(1822년) 8월에 성을 2350척으로 확장보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축조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고종 7년(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도 세웠는데,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는 동시에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 우물 4개소와 치를 신설한 다음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들여 서편 수문에서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 금마천으로 흘러가게 하고 동ㆍ서ㆍ북 세 곳에 문을 세웠다. 경오년 2월 7일 준공과 함께 조정에 보고해 10월 15일에 대원군이 휘호한 문맥을 받았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명명했으며, 남문은 홍예문으로 문루가 없었다. 문비는 조양문만 철판이었고 나머지는 목판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홍주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의 정기를 꺾는다는 명목으로 1913년 서문을, 1915년 북문을 철폐하고 조양문 마저 철거하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부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서문과 북문의 위치는 지난 2008년부터 발굴과정에서 위치를 찾았으나 원형복원이 과제로 남아 있다. 홍주성은 1917년, 1959년, 1969년 보수했고, 1972년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돼 홍주아문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됐다.

홍주성은 읍성에 해당된다. 읍성은 거주 주체가 왕이 아니고 군, 현의 주민보호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한 성이다. 따라서 '도성'과 '읍성'에 대한 구분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을 '도'라 하고, 없으면 '읍'이라 하여 이러한 고을에 방형으로 시설된 성곽을 일컫는다. 여기서 도성과 읍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읍성 형식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읍성이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부족국가시대 집단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책을 읍성의 형태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통일신라시대의 주, 군, 현에 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러한 형태의 성이 오늘날의 읍성형태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현존하는 읍성의 성격을 갖춘 성곽의 형태는 고려 말 왜구에 대비하여 연해 위주에 읍성을 축조한 것이 처음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홍성의 홍주성을 비롯해 이웃 서산의 해미읍성, 부산의 동래읍성, 경기 수원성, 전북 고창읍성, 낙안읍성, 남도석성, 경주읍성, 진주읍성 등이 있다.

도성(都城) 또는 경성(京城), 읍성(邑城)이란?

도성(都城)은 한 국가, 권력의 상징인 왕이 평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에 내곽(內郭)인 궁성(宮城)과 외곽(外郭)인 나곽(羅郭)을 갖춘 형태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도성은 삼국초기부터 발달되었는데 중국과는 달리 평지(平地)에 조성된 바둑판식의 중국식이라기보다 산성(山城)에서 발전된 방식으로 지형 여건에 맞게 민가(民家)와 관아(官衙) 건물을 수용하고 자연 지리적 이점(利點)을 이용하여 방어력도 높였다.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고구려의 장안성(평양), 백제의 공산성(공주), 사비성(부여), 고려의 개경도성(개성), 조선시대의 한양도성 등이 있다. 신라는 도성을 따로 쌓지 않고 왕궁인 월성(月城)만 있었다고 전한다.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거주하면서 일정한 공동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 건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인위적인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밖으로 네모꼴로 쌓은 곽으로 구성되는 이중벽의 형식을 띤다. 이때 안쪽의 것을 '내' 또는 '내성'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 또는 '외성'이라 한다. 그리고 성곽은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게 되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지를 이용한 산성이,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을 형성하는 부정원형이 많다.

그렇다면 홍주성과 같은 읍성(邑城)이란 무엇인가. 도시를 둘러싼 성을 '도성(都城)', 궁궐을 둘러싼 성을 '궁성(宮城)'이라고 한다면 읍성은 그보다 작은 행정단위인 군(郡), 현(懸) 등의 지방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읍성 안에는 보통 고을을 다스리는 동헌과 관아, 조정에서 오는 관리를 맞이하는 객사를 비롯해 지방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고, 민가와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성 밖에 사는 주민들도 성 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굳게 닫고 마을을 지키게 된다. 그래서 읍성은 전투를 위한 시설들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다. 이런 읍성들은 고려 말 이후 해안 마을을 자주 침범한 왜구를 막기 위해 주로 바닷가 고장을 중심으로 많이 축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고을 거의 절반 이상이 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았던 읍성들 중 거의 완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모두 9곳에 불과하다. 낙안읍성은 그 9곳의 읍성 중에서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낙안읍성이 특히 유명한 것은 성곽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성 안의 마을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안으로 들어서면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의 마을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게다가 마을은 완전한 민속마을로 꾸며져 있어 여러 가지 볼거리로 넘쳐난다. 그러다보니 낙안읍성을 구경하러 오는 인파는 굉장하지만 대부분은 성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민속촌에 놀러 오는 행락객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문화유산의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낙안읍성에 가면 일단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성벽 위로 올라 성곽을 밟고 걸으며 성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곽의 넓이는 2m, 성 전체의 둘레가 1.4km 정도이므로 그다지 힘들 것도 없다. 성곽 위를 걸으며 성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읍성의 형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동헌과 객사가 있고 그 앞으로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열십자 형태의 길이 나 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 시장이 펼쳐져 있다. 읍성의 지형에 따라 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것이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구조인 것이다. 해미읍성이나 고창읍성 같이 성 안에 마을이 남아있지 않은 읍성에 가더라도 이러한 구조를 익혀두면 성을 답사하는 시각이 달라진다.

이밖에도 성 밖에 조성된 방어용 개울인 '해자', 성 위의 방어시설인 '성가퀴',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성벽 중간 중간 ㄷ자 형태로 돌출된 '치'등 성곽의 주요 시설물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성가퀴는 다른 말로 여장이라고도 하는데, 총을 쏘는 총안(銃眼)이 있는 핵심적인 전투시설이다. 치는 성곽의 일부가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인데,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성벽에 가까이 있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시설이다. 이런 시설들을 구경하며 성벽 위를 걷다보면 성벽은 서문 쪽에 이르러 다소 높은 언덕을 끼고 높아지게 된다. 이 부근이 낙안읍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홍주성의 복원에 있어서도 낙안읍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성을 구경하는 관람객과 민속마을을 관람하려는 관광객들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면 홍주성은 원형복원을 통해 충분히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홍주성은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성곽은 모양과 축성목적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한나라의 수도를 방어할 목적으로 지어진 것을'도성'이라 하고, 산이나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축조한 우리나라 대표적 성곽형태를 '산성', 국경지역에 주로 쌓아 외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장성'이라고 한다. 홍주성과 해미읍성처럼 주요 군사지역에 세워지며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성곽을 '읍성'이라고 하는데, 홍주성이나 해미읍성은 그 만큼 홍주지역과 해미지역이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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