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여 년의 순교 역사를 통해 천주교 대전교구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이자 많은 성인과 성지를 탄생시킨 신앙의 못자리이다. 한국의 산티아고로도 불리는 내포지역 성지순례를 통해 여러 순교성지를 만날 수 있다.
순례길에는 아직은 순례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순교성지도 있다. 백제와 후백제의 정기를 품은 예산 대흥의 봉수산과 예당호로 둘러싸여 배산임수 최적의 조건을 가진 순교의 땅에는 ‘대흥봉수산순교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예산의 ‘대흥봉수산순교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 순교성지의 지리적 특성으로 예산, 홍주, 공주, 청양지역의 복음 전파와 박해의 길목이 됐으며, 당시 조선 정부는 대흥, 홍주, 신창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와 천주교 확산을 차단하고자 했던 곳이다.
충청도 홍주의 대흥 출신이었던 김정득 베드로와 여사울 김광옥 안드레아는 사촌지간이었다. 이들은 ‘의좋은 형제’로 불리며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순교자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796년 여름부터 1800년 봄까지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서울을 피해 충청도에서 전교하며 교우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고, 성물과 교회 서적들을 김정득 베드로와 ‘정산일기’를 쓴 정산 이도기 바오로를 비롯해 내포지역 회장들에게 맡겼다. ‘대흥봉수산순교성지’와 연고가 있는 순교자는 김정득 복자 외에 황 베드로, 백청여, 원지우 안드레아, 이루도비코, 이 아우구스티노 등이 있다.

김정득 복자는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 복자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두 복자는 신앙과 은수 생활, 옥 순례와 순교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친교와 우애를 보여주면서 ‘순교자 3계’인 신덕(信德;천주를 배반하지 말라), 애덕(愛德;교우를 일러바치지 말라), 망덕(亡德;성물과 교회 서적을 바치지 말라)을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두 순교자는 서로 고향이 달랐으나 공주 무성산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됐다. 그들은 예산, 홍주, 청주를 거쳐 한양까지 이송됐으며, 여러 차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지시에 따라 1801년 8월 두 순교자는 예산까지 함께 이송됐다. 이후 김정득은 대흥으로 보내졌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면서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같은 날 8월 25일에 순교했다.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옆에는 ‘대흥관아’가 있으며, 그 안에는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다. 또한 대흥관아 앞에는 ‘의좋은 형제 효제비’가 있고, 가까이에는 ‘대흥옥’과 조리돌림을 하던 ‘저잣거리’가 있으며, 순교한 ‘참수터’ 등을 재현한 순교자 공원이 조성돼 있다.
천주교 대전교구가 개발한 예산 대흥봉수산순교성지는 지난 2016년 예산군이 1억7000만 원을 들여 순교성지에 십자가의 길 조형물과 쉼터 등을 설치했다. 대흥봉수산순교성지는 2014년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복자로 시복된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욱 안드레아의 신앙과 성덕을 현양하기 위해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2015년도부터 성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예산군은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조형물 설치사업’ 제안 공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을 기억하기 위한 조형물인 십자가의 길(14처 조각)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3번 넘어짐을 의미하는 쉼터 3곳이 조성돼 있다.

■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복자 김정득 베드로는 예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복자 김 베드로는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복자 김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입교 후 그가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복자 김 베드로는 복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전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후 복자 김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됐다.
홍주 관장은 복자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위해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복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복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됐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돼 8월 21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해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복자 김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했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해도 아주 모질어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고 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복자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서 대흥옥에 수감됐고, 복자 김 안드레아는 예산옥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튿날 복자 김 안드레아는 예산에서, 복자 김 베드로는 대흥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 복자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서로 약조대로 한날한시에 ‘의좋은 순교자’가 돼 주님 품에 함께 안겼다.
조선 시대의 처형지는 내천변(奈川邊)이라는 곳으로 지금은 예당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현재의 대흥봉수산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심문을 받고 고문을 받았던 대흥관아인 대흥동헌 옆에 위치해 있다. 순교성지 안에는 ‘대흥옥’을 비롯해 ‘조리돌림 하던 저잣거리’와 ‘순교한 참수터’ 등을 재현한 순교자 공원이 조성돼 있다.
또한 의좋은 형제 비석은 대흥관아 바로 앞에 붙어 있고, 의좋은 형제 동상은 관아 옆 대흥면사무소와 대흥초등학교 사이는 공원처럼 조성돼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제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돼 있는 실화이다.
1978년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서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발견되고, 최근에 이두문자가 해독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이 비석은 고려초 효자로 이름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연산군3년(1497년)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의 주청에 의해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佳芳橋) 옆에 세워졌다.
조선 초기 양식의 화강암 비석에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해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가 기록돼 있다. 따라서 비석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 있었는데, 예당저수지로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대흥면행정복지센터 앞으로 옮겼다.
또 대흥동헌 앞 의좋은 형제상 앞에 놓인 12개의 돌에는 196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 전문이 새겨져 있다. 고려 말 이성만, 이순 형제를 기리는 ‘의좋은 형제비’와 공원이 있기에 순교신앙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의좋은 형제’ 마을에 ‘의좋은 순교자’
대전교구는 2019년 5월 6일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념하고, 특별히 ‘의좋은 순교자’로 불리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사촌 형제인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를 기억하고,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대흥봉수산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처형된 장소의 특성을 살려 토지면적 4628㎡에 330㎡의 임시 성당과 2314㎡의 ‘형옥원’을 갖췄다.
형옥원에는 박해시대 순교자를 가뒀던 형옥 시설인 옥사, 저잣거리, 처형대가 재현돼 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아울러 성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되새기며, 봉수산이 감싸 안은 예당저수지와 조화를 이루는 주변의 자연환경 속에서 순교 영성과 창조질서 보전을 함께 전파해나갈 예정이다.
원래 대흥 관아의 옥사는 상중리 296번지의 옥담 거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拷訊)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를 순교성지로 조성하면서 모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형옥원(刑獄苑)’에 들어서면 넓은 잔디 광장 한가운데 두 팔 벌린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겨 맞이하고 있다. 성모상이 세워진 받침대는 사형을 집행했던 ‘참수대(斬首臺)’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로 전통 목조건물이 있는데 바로 ‘대흥옥사(大興獄舍)’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지어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옥사(獄舍)이기에 문마다 여닫는 창호 대신 창살이 쳐져 있다.
대흥옥사와 관련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승의 지옥인 옥에는 ‘옥중오고’가 있다고 했다. 곧 큰 칼, 갈취, 질병, 추위와 주림, 무기가 그것이다. 그중 출옥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유체고가 으뜸이라 했다. 천주교인들과 같은 양심수들에게 ‘옥중오고’가 길어지면 신념을 버리고 배교하거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했다.
신유박해(1801) 때 대흥 사람인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여사울 사람인 김광옥 안드레아는 공주 무성산에서 잡혀 대흥과 예산에 투옥됐다가 홍주와 청주의 포청옥으로 이송돼 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대흥옥과 예산옥에서 각각 마지막 밤을 보내고 1801년 8월 25일 정오에 대흥과 예산 형장에서 참수돼 ‘의좋은 순교자’가 됐다고 순조실록 2권에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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