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과 태안, 해미지역에서 활동하는 30여 명 접주와 간부들 체포 수감
덕포와 예포 대접주, 보은대도소로 달려가 하루빨리 기포 구출을 호소
세성산 전투에 이어 홍주성 전투 패배, 공주의 우금치 전투까지 먹구름
서산 해미성·매현 전투 패배, 후퇴한 동학농민군 태안 백화산으로 퇴각
동학농민군이 내포에서 대규모의 동학혁명운동 깃발을 처음 올린 곳은 서산 운산면(雲山面) 원벌(元坪)이었다.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혁명의 깃발이 올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내포 지역 동학군들은 서산 운산면 용현리(龍賢里) 보현동(普賢洞)에 있는 이진사(李進士)를 응징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300여 명이 원벌에 모였다. 이진사는 평소 동학도를 탄압했으며 소작 관계로 마찰을 일으켜 민심을 잃었다.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4월 9일에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개심사(開心寺)로 넘어갔다고 기록했다. “어제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오늘 개심사로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개심사로 가는 동학군들이 끊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보현동 이진사가 평소 동학을 심하게 배척해 동학도들이 원한을 품고 개심사에 모여 회의한 후 그 집을 부수리라 한다. 예전 내포에는 동학도가 매우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이 역시 시운이라 매우 통탄스럽다.”
당시 몸소 참여했던 서산의 홍종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차로 통문을 돌려 홍주 원벌(元坪)에서 대회를 열게 되었다. 구름 모이듯 잘도 모여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만 명 모였으며 이 소문은 이진사에게 갔다. 우리는 개심사란 절로 이진을 했다가 가니 이진사는 전과를 사죄하고 죽기를 청하였다. 항자불사(降者不死)라고 우리는 그를 효유해 놓아 보냈다”고 했다.
내포 일대의 군현 수령들과 유생들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고무돼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서산군수 박정기(朴錠基)와 태안군수 신백희(申伯禧), 태안방어사 김경제(金景濟)는 동학농민군들을 강제로 귀화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동학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고자 지도급 인사들을 모두 체포해 처단하기로 했다. 이들은 서산과 태안, 해미지역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해 수감했다. 그리고 10월 1일 서산관아에서 모두 처형키로 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예포와 덕포의 동학지도자들은 비상 대책을 마련했다. 덕포와 예포 대접주는 9월 15일경 보은대도소로 달려가 하루빨리 기포해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0월 1일 아침 동이 틀 무렵, 서산관아를 에워싼 동학농민군들은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관아로 쳐들어갔다. 우선 수감된 접주들을 전원 구출하고 군수를 잡아 결박, 타살하고 악질 관리들을 색출했다.

■ 홍주성 패배, 일락산 넘어 해미성으로
동학농민군은 10월 28일(양 11월 25일)의 홍주성 전투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했다. 동학농민군의 희생자는 대부분 결사대에 참가했던 인물들이었다. 10월 21일의 천안 목천의 세성산 전투에 뒤이어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까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서울 진격을 위한 교두보 확보가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홍주성 전투의 패배는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반면 진압군의 활동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제 11월 2일 결성 공수동에 도착한 일본군과 관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기록에는 “여기서 적을 격퇴, 적 수천 명을 살상하고 그 거괴 이창구(서산 사람), 이군자(李君子, 면천의 거괴) 2명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스스로 홍주성 전투에서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홍종식은 “실상은 홍주서 관군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니다. 관군들은 홍주성을 튼튼히 닫고 지구전을 하기로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래 대항하기가 어려워 자퇴해야 함으로써 헤어진 것”이라고 했다. 29일 오후부터 일부 동학농민군은 소리 없이 흩어지기 시작해 해미성 쪽과 면천 쪽으로 나뉘어 갔다. 철수한 동학농민군 중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000명 정도였으며, 귀밀성(貴密城)과 도루성(猪樓城)에 집결한 인원은 4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들이 해미성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두황은 10월 29일 공주에서 병력을 서쪽으로 돌려 11월 6일 지금의 덕산면 옥계리(玉溪里)와 상가리(上加里) 일대인 가야동(伽倻洞)에 들어가 유진했다.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일락산(日落山)을 넘어 7일 새벽에 동학농민군이 있는 해미성을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밤중에 영관과 병졸 1800여 명을 인솔하고 일락산 정상인 석문봉(石門峰, 600m)으로 올라가 4km 떨어져 있는 해미성의 지형을 살폈다. 삼경이 되자 전군을 깨워 산정으로 끌고 올라와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게 했다.
11월 7일 먼동이 트이기 시작하자 전군에 명령하기를 “해미성으로 달려가 성의 북쪽 능선 향교 부근에 집합하라”고 했다. 이때 동학농민군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하기를 기다리던 이두황은 동학농민군들이 아침을 들기 시작하자 전군에 공격령을 내렸다. 북쪽 성채를 넘어 벌떼처럼 쳐들어가니 밥을 먹다가 기습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대오를 정돈하고 대항하려 했으나 이미 관군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2시간 남짓 동학농민군과 관군은 혈투를 벌였다. 훈련받지 못한 농촌 출신인 동학농민군은 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잡혔다. 나머지는 서산·당진·면천 쪽으로 후퇴했고 일부는 인근에 있는 귀밀성과 도루성에 합류했다. 오후에 이르러 일본군과 관군 1개 소대는 귀밀성을, 2개 소대는 도루성을 공격했다. 여기서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동학농민군이 패하고 말았다.

■ 마지막 매현전투, 인지 화수리 매봉재
동학농민군 일부는 서산의 매현에 집결하게 되니 1000여 명이 넘었다. 매현은 서산으로 쫒겨가던 동학농민군들이 쉽게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고향인 면천과 당진, 예산과 온양 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매현은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으며, 해미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서산에서 보면 10여 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시야가 트여 있는 곳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무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으며 규율도 있었다.
이튿날인 8일에 이두황은 서산의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라고 1개 중대(참령관 元世祿)를 파견했다. ‘양호우선봉일기’에는 “이튿날 참령관 원세록이 1개 중대 병력을 인솔하고 서산지방을 순초하려 나갔다가 적의 큰 소굴을 발견했다. 즉 서산 매현이란 곳인데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다. 원조경으로 살펴보니 주변에는 깃발을 꽂고 적들은 가운데 모여 밥을 짓고 있었다. 황혼 때에 몰래 서산읍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겨우 황혼이 지자 적들은 밥을 먹으라 부르고 있었다. 눈치챌까 염려돼 밥 먹기를 기다렸다가 불의에 나타나 함성을 지르며 포를 사격했다. 적도 저항하니 총알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대포도 연발했다. 잠깐 쉬다가 또 공격하기를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찌된 일인지 적이 갖고 있던 화약에 불이 붙어 굉음이 하늘을 뒤집고 땅을 꺼지는 것 같았다. 적의 무리 수천이 일시에 쏟아져 내리면서 산산이 흩어져 달아났다. 우리 병사들도 잠시 놀랐다가 정신을 차려 수백이 날쌔게 달려들어 물리쳤다. 흩어진 무기를 거둬 읍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현에 주둔했던 동학농민군은 황혼 때 저녁을 먹다가 기습을 받았다. 관군에 비해 월등한 병력을 가진 동학농민군은 재빨리 대오를 정돈하고 응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약더미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군진이 흩어져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아마도 일본군과 관군이 포격으로 화약더미가 폭발한 줄 알고 당황했던 것이다. 일본군과 관군도 놀라 일시 후퇴했다가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다시 공격했다. 일본군은 10월 25일부터 11월 8일까지 홍주성에 머물며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뒤 11월 9일 대흥을 거쳐 떠나갔다.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과 홍주 관병, 민보군은 11월 중순 이후 대대적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죽어갔다.
여기서 서산 매현은 부춘산 마사라는 설과 서산 수석동 소탐산 북편이라는 설, 인지면 화수리 매봉재라는 설 등이 있으나 매봉재 전투에 관한 기록(해미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노지면 수현리에 집결했으나 패했다. 저녁 먹을 때쯤 싸움이 시작돼 초저녁에 동학농민군이 완전 패했다)을 근거로 인지면 화수리 매봉재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고 있다. 관군의 기록에는 “해미성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은 노지면 수현리에 집결했으나 패했다”와 “저녁을 먹을 때쯤 싸움이 시작돼 초저녁에 동학농민군이 완전 대패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서산에서 후퇴한 동학농민군은 태안 백화산으로 퇴각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