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공주는 조선 시대의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으로 충청지역 행정의 중심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충청도 5영 중 우영(右營)의 수장을 겸임해 충청도 관찰사는 행정과 군사, 치안을 동시에 담당했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한때는 한반도 서남부의 중심이었던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성지(공주시 왕릉로 118)는 충청도에서 대표적인 순교지로 꼽히는 곳이다.
공주는 홍주(지금의 홍성읍), 해미(지금의 서산시 해미면)와 함께 100년여 동안 천주교 박해의 중심지였다. 홍주 역시 읍성이 있고 이를 지키는 군영이 있었으며, 해미에도 읍성이 있었고 한때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배속된 병영이 있었다. 실제 공주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처형이 이뤄진 곳이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예산·해미·덕산·신창·홍산·연산·청양·보령·진잠·유구·직산·천안·공주·비인·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충북의 청주·진천·연풍·옥천, 전라도의 전주·광주, 경기도의 죽산·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 등 매우 다양하다. 곧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이곳에서 처형됐던 것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판결을 받은 사학 죄인들에게 사형 집행은 출신 고향에서 하도록 했는데, 이를 ‘해읍정법(該邑正法)’이라고 했다. 공주지역의 순교자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금강 유역의 공주지역은 홍주, 해미 등 내포 지역에 못지않게 천주 교세가 강했음을 입증한다.

■ 공주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
공주 들머리의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위치는 지리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모래사장이 있어 공개 처형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 언덕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많이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는 말에서 황새바위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교도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 구경을 했다고 전해진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했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황새바위 순교성지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흐르는 물이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백제가 멸망하던 때 백제 부흥을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이곳 공주(당시 웅진성)을 거점으로 싸우다가 나당연합군에게 피를 흘렸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티(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해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의로운 피를 수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 단일 성지로 전국 최다의 순교자 내
공주지역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신해박해 (1791)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1791년 공주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김명주와 홍철, 인철 부자가 내포 사람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2년 관찰사 박종악의 수기에 공주 산상면 규동(현 공주시 유구읍)에서 이덕침 등 4형제가 사학(邪學)을 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초기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했던 거룩한 땅이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달레는 공주 감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는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했다. ‘공주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감영록에는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그밖에 밝혀진 순교자 등을 합하면 공주지역에서 순교한 사람의 수는 337명이라고 한다. 따라서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단일 성지로서 전국 최다의 순교자를 낸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연령과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순교자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밖에 안 됐고, 최연장자는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됐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 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지켰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했던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사학의 괴수’라는 이름을 들은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손자선 토마스(1844~1866)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들이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손 토마스가 자진해 덕산 관가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관가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부으면서 조롱했지만 토마스가 굴하지 않자 덕산 관장은 그를 해미로 압송했다.

■ 충청도 최대 순교지 ‘황새바위 순교성지’
해미에서 그는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더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지켰다. 그는 “나도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 몇천 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고 말하며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해미에서 공주 감영으로 압송됐는데, 공주에서 관장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토마스는 즉시 자신의 양팔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했다. 결국 토마스는 공주 감영으로 압송돼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존창 루도비코 (李存昌, 1752~1801)는 충남 예산의 농민 출신의 학자로, 초기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에 신부가 돼 충청도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쓴 결과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같이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알고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윤유일(尹有一)에게 여비를 줘 중국 북경에 보냄으로써 마침내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게 했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돼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때 배교해 홍산(鴻山, 부여지역)으로 이사를 갔으나,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는 더욱 열심히 전교함으로써, 내포와 인근지역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게 됐다. 그의 조카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할머니였고,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 공헌은 지대했다. 1795년 말에 그는 다시 체포돼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아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참수됐다.

충청도 최대의 순교지인 ‘황새바위 순교성지’가 긴 잠에서 깨어난 시기는 1980년에 들어서다. 1980년 12월, 성지 조성을 위해 부지 매입이 이뤄지고 1984년에 ‘황새바위성지 성역화사업 추징위원회’가 구성됐다. 1985년 11월 7일 무덤 경당과 순교탑 봉헌식이 있었고, 2002년 11월 29일 성전이 건립돼 봉헌식을 가졌다. 2011년 9월 24일 황새바위 순교자 337위 명부 봉헌식을 가짐으로 성지의 개발 촉진의 계기가 됐다. 이듬해 2012년 1차 성지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성지의 면모를 확 바꿨다. 성지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정상에 황새바위 광장과 야외성당을 조성하고, 사무실과 쉼터(카페 몽마르트) 등을 새로 지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