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성지, 조선 최초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 첫 사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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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성지, 조선 최초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 첫 사목지
  • 취재단=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학생기자단
  • 승인 2024.09.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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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9〉
강경성지성당 전경. 등록문화재 제650호.
강경성지성당 전경. 등록문화재 제650호.

충청도 논산의 강경은 내륙 깊숙이 뻗어 들어온 금강 줄기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강경은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널리 이름을 알리며 조선에서 제일의 포구로 자리 잡았던 곳이다.

금강을 통해 서해에서 생산돼 나오는 천혜의 해산물과 물 건너온 각종 교역품 등을 실은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더욱이 육상 도로망도 잘 이어져 있으니, 이곳에 모인 물자들은 전국 각지로 쉴 새 없이 팔려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만 하루에 2~3만 명씩이나 됐으며,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까지 강경에 자리를 잡고 그들만의 상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땅, 강경에는 의외로 ‘최초’라는 것이 많이 있는 곳이다. 놀랍게도 충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 강경이었으며, 충남 최초로 은행이 들어선 곳도 강경이고,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 문을 연 곳도 강경이었다, 또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의 성무가 시작된 곳이자, 일제에 대항해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강경의 토박이 주민들은 ‘강경의 활발한 분위기와 다양한 것들을 보고 접했던 강경 사람들의 개방적 성향, 그리고 높은 교육열이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진단하며, 기독교가 강경에 깊숙이 뿌리 내릴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구한말까지 강경에는 하루 100여 척이 넘는 배가 다녔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무척 혼잡했어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네였던 것이죠. 게다가 소위 ‘돈’을 가진 객주들의 힘이 막강했던 탓에 아무래도 나라의 간섭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죠. 이러한 연유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감시를 피해 몰래 들어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죠.”
 

강경의 성 김대건 신부 첫 사목지.
강경의 성 김대건 신부 첫 사목지.

■ 김대건 신부 첫 사목 기념해 성당 건립
실제로, 수많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강경 포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와 강경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퍼져 선교 활동을 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도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배를 타고 강경포구로 들어와, 시장 근처 객주촌에서 숨어 지내며 한 달 동안 신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마침내 10월 12일 우리는 충청도 강경에 도착했습니다. 중간에 폭풍을 만나고 암초에 부딪히며 우리의 형편없는 배로는 도저히 서울까지 갈 수 없어 이곳에 상륙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돛대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항구를 빠져나오는데도 큰 곤경을 겪었습니다. 밤에 신자 2명이 우리를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굵은 베로 만든 겉옷과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14명의 일행을 태운 라파엘(Raphael)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강경 포구에 닻을 내렸을 때의 상황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도착한 페레올 주교가 스승인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속에는 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도착 과정이 상세히 쓰여 있다. 1946년에 설립됐다가 1961년에 새로 건립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을 기념해 건립된 ‘강경성지성당’에 가보면 그의 일대기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강경에서 조선의 첫 천주교 신부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달 남짓 시장 근처 객주촌에 숨어 지내며 신도들과 미사를 드렸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김대건 신부는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체포돼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제 저는 하느님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사제로서 짧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작은 ‘믿음의 씨앗’은 이 땅 위에 활짝 꽃을 피웠다.
 

강경성지성당의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강경성지성당의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 강경성지성당, 1961년 건축한 등록문화재
강경성지성당은 1946년 논산 부창동 성당에서 분리돼 설립됐다. 현재 건물은 1961년 건립된 것으로 건축적, 종교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돼 지난 2015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50호로 지정됐다.

현재의 강경성지성당은 1961년 건축에 조예가 깊은 프랑스인 에밀 보드뱅 신부(1897∼1976) 의 설계와 감독으로 지었는데, 건립 당시의 구조와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활용 여건이 양호하고 일반적인 당시의 건축구조 형식을 벗어나 특이한 구조방식인 첨두형 아치보로 내부를 구성하는 등 현대적 처리가 돋보이는 성당 건축물이다. 

보드뱅 신부는 1927년 경남 언양성당에 부임해서 언양성당(등록문화재 103호)을 지었고, 한국에 10여 개의 성당을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경성당이 위치한 장소는 본래 논이 있었던 지역으로 지반이 매우 약해 대형 건축물을 세우기에 불리했지만 오랜 궁리 끝에 일종의 배의 원리를 이용한 뜬 구조로 해서 큰 성당을 완공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건물의 골조뿐만 아니라 외관도 배의 형상을 했으며, 정면 중앙에 높은 사모 지붕의 종탑이 있어 돛대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당 앞 잔디밭 둘레를 따라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당 뒤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이며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해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됐다. 이후 조선에 돌아와 선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강경성지성당에는 ‘성 김대건 교육관’과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이 있다. 교육관에는 조선 2대 포구였던 강경의 역사와 한국의 첫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 첫발을 디딘 후 한 달 동안 강경에 머물면서 활동했던 강경생활의 자료들이 있다. 또 기념관에는 강경의 역사와 김대건 신부의 삶, 입국 경로, 사목 생애 등을 보여주는 상설 전시관을 두고 있다.

강경은 최근 가톨릭 역사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존 김대건 신부 연구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화산 나바위에 상륙해 강경에 잠시 머문 뒤 바로 서울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상륙지가 ‘나바위가 아닌 황산포이고, 강경을 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한 달 남짓 머물며 신부로서 첫 사목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따라서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강경성당을 성 김대건 신부 ‘사목 성지성당’으로 지정했지만, 첫 상륙지와 사목활동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익산 나바위성당 측은 지금까지 익산 나바위가 김대건 신부 상륙지로 널리 알려졌고, 나바위성당은 그 사실을 기반으로 건립된 성지와도 같은 곳이라 쉽게 논산 황산포 상륙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전북 익산 나바위 성지는 1845년 10월 12일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실제 익산 나바위와 논산 황산포구는 각각 행정구역으로 나뉘기도 하고 교구도 각각 전주교구, 대전교구 소속이기에 이견 충돌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실제 나바위와 황산포구는 같은 생활권일 정도로 거리가 매우 가깝기도 하고 나바위가 옛날엔 은진군 강경현 소속이었던 걸 생각하면 조속히 김대건 신부의 상륙지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강경성지성당의 성 김대건 교육관 전경.
강경성지성당의 성 김대건 교육관 전경.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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