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현 접주 김기창 중심 ‘동학소굴’로 불린 건지동서 활발한 활동 전개
동학시기 정산, 민씨들이 시집 잘 보내서 세도를 부린다고 해 ‘치마양반’
청양동학교도, 나라 지키고 백성 안심시켜 편히 살게 한다 내 세워 집회
정산현, 농민군에게 돈·곡식 등 빼앗겨, 청양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활발
충청도 청양(靑陽)은 ‘콩밭 매~는 아~낙~네야’ 노래로 잘 알려진 ‘칠갑산’과 청양고추, 구기자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충청남도 서남부 두메산골 청정지역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곳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 기호 유림의 본고장으로 옳고 그름, 의와 불의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지닌 선비의 고장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구한말, 일본군과 정부군이 동학교도와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청양 일대에서는 폭정에 저항하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1904년에는 지계(地契; 조선 말기, 땅의 소유권을 증명하던 문서) 사업에 대한 농민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 목면 장터, 안심리의 ‘동학소굴’ 건지동
청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양현과 정산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청양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산현 지역에서는 접주 김기창을 중심으로 목면 장터마을과 안심리의 ‘동학소굴’로 불린 건지동(건지울; 현재의 청양 목면 안심리 건지동마을)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청양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정산 접주 김기창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정산을 접수하자 당시 정산군수가 매일 찾아와서 빌은 것’으로 ‘목면면지’에 적고 있다. 청양의 동학 접주 김기창은 정산향교의 제기와 예악형정(禮樂形政)의 기구, 무기들을 빼앗아 공주성을 점령한 후 서울로 들어가기로 했다.
‘양호우선봉일기록’에는 관군은 정산에 이르러 ‘동학교도의 소굴인 건지동을 쳐서 45명을 체포하고 행인들을 조사해 행패자를 적발했다’고 한다. 또 ‘두목 28명을 녹야평(錄野坪; 지금의 정산면 서정리 정산향교가 있는 곳)에서 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청남 청소리에서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가혹한 진압이 자행됐다. 동학농민군을 잡아다가 쇠도리깨로 때려 잡았고, 황토벽에 구멍을 뚫고 올개미를 넣어 바깥으로 빼고 잡아당겨 죽였다고 전해진다. 밖에서는 비명소리도 용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동학시기 정산에서는 민씨들이 세도를 부렸다고도 전해진다. 시집을 잘 보내서 세도를 부린다고 ‘치마양반’이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양 목면의 솔안마을은 일본군이 쳐들어와 동학농민군들과 마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수년 전까지 후손들의 증언이 잇따르는 마을이라고 한다. 당시 동학농민군과 마을 사람들은 고개 넘어 ‘왕둠벙’으로 도망을 갔으며, 왕둠벙에 있는 바위에 사람들이 숨어있었다고 전한다. 이명섭·경섭·영섭 3형제는 건지울에 살다가 솔안마을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군에 학살돼 솔안마을 앞산인 안산에 묻었는데, 산소가 있었던 자리에 사초(莎草; 무덤에 떼를 입혀 잘 다듬는 일)를 하기 위해 갈퀴질을 하자 곧바로 유골이 나왔다”고 지난 2005년 당시 후손인 이영호가 증언했다고 전한다. 이 증언으로 미뤄볼 때 당시에 일본군에 학살된 사람들의 주검을 묻는 과정에서 무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급하게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건지울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연유와 관련된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연인즉, 당시 건지울에 권 판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권 판서에게는 두리봉에서 나팔을 불어서 나팔소리가 들리는 곳까지의 땅을 모두 줬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때 나팔소리가 ‘나발티 고개’까지 들렸다고 해서 고개 이름을 ‘나발티 고개’라고 불렀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한편 정산 신덕리의 이영수는 정산에서 양반으로 유구와 정산의 동학농민혁명을 가라앉혔던 집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영수의 집 바로 옆집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모의를 했던 집이었다’는 증언이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홍양기사’에는 1894년 11월 3일 “일본군 1진(陣)이 금영(錦營)에 주둔하고 있다가 정산의 괴수 김기창을 토벌했다. 완적(完賊)에 빌붙은 자들이 모두 패하여 흩어졌으나 사방에서 적의 위협이 여전하여 어수선했기 때문에 지킬 대비를 더욱 엄중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위국안민’을 내세우며 집회를 열어
1894년 2월경, 청산 차현 출신인 김영배는 서울에서 내려와 경기도의 양성 소사평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의 동학농민군과 10여 일 머무르다가 전라도 금구 원평의 동학교도들에게 갔다. 3월 21일, 김영배는 무리를 집결시키는 비밀통문을 가지고 충청도로 향했다.
이른바 전라도 무장 지역의 봉기를 충청도 또는 경기도로 확산시키려는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4월 11일, 김영배는 충청도로 가는 도중 전주 독교가에서 포교에게 체포돼 전주 남문 밖 시장에서 목을 베어 매달아 두는 참형을 받았다.
1984년 7월 5일에는 임천접 소속 동학 무리들이 정산현 관현면 신대리에 사는 진사 조창하의 집에 쳐들어갔다. 이들은 도망치는 조창하를 때려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금품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정산현의 많은 집들이 동학농민군에게 돈, 곡식, 말 등을 빼앗긴 상태였다. 같은 시기에 청양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양반들이 꼼짝없이 당할 정도로 동학은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토호 양반이라도 횡포한 양반으로 지목되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거나 일정한 부역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노비와 주인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말을 높이고, 마루에서 ‘동석대좌(同席對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동학 이념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재산 빼앗기, 산송(山訟; 묘지분쟁)문제 해결, 고리대·고용·소작 관행 개선’ 등 봉건 지배층의 횡포를 타파하는 혁신적 활동을 전개했다.
1894년 7월 7일에는 서천, 이인 지역과 함께 청양읍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심시켜 편히 살게 한다는 의미의 ‘위국안민’을 내세우며 집회를 열었다. 8월 4일에는 동학농민군 700여 명이 공주에서 정산, 평촌을 거쳐 광암으로 이동했다.
이어 8월 6일에는 호서선무사 정경원이 홍주에서 동학 접주들을 불러놓고 동학교도들의 해산을 명하는 왕의 윤음을 전달했다. 그 자리에는 정산의 김기창도 있었다. 정산의 김기창 부대는 동학농민군이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공격했던 10월 23일에 이인 전투에 참여했고, 11월 8일과 9일의 우금티 공격에도 함께했다.
김기창 부자가 활동한 정산 땅의 건지동은 ‘동학교도의 소굴’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은 마치 관아처럼 새벽에 문을 열고 저녁에 닫을 정도로 세력이 크고 조직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건지동은 11월 3일에 일본군, 그리고 11월 13일과 11월 16일에는 관군 이두황 부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청양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우금티 전투가 있었던 공주와 가까운 지역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의 움직임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청양 목면 건지동의 동학접주 김기창은 이인 전투와 우금티 전투에도 참가했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살해됐다.
특이한 점은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주체로 절대 다수가 일본군을 들고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주체가 과연 일본군인가, 조선의 정부군인가 하는 점은 사실 불명확하다. 대부분 ‘일본군과 조선의 정부군’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 농민들이나 민중들은 학살 주체를 ‘일본군’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근대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동학농민혁명 진압과 대량학살이라는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에 의한 왕궁점령사건 이전, 동학농민군은 무장하지 않은 일본인을 공격하거나 살상행위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금은 국법의 세곱, 네 곱을 매기는 게 제값이고, 환곡의 이자는 원금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 죽은 자에겐 백골징포, 젖먹이에겐 황구첨정, 가족에겐 족징, 이웃에겐 인징, 수령에게 살점을 뜯기고, 아전에게 뼈를 발리는…” 동학농민군의 본질적 봉기 의도와는 달리 동학 신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와 구실로 농민들을 모조리 학살한 사건으로 기록될 동학농민혁명.
1894~1895년,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동학농민군 숫자는 최소 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학살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일본군이 남긴 작전일지, 전투상보, 진준일지 등 사료의 공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청양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취재하면서 구체적인 사료나 관련 자료 등의 조사에 한계가 따랐다. 따라서 모시는사람들 발행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정선원 지음)’ 청양지역 편을 참조하면서 현장 취재를 진행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청양지역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지역주민들과 관계자, 전문가들의 자료나 제보 등도 기대하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