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 동학농민혁명 초기 활동 이복영 일기에 기록돼
접주·접사 실무 집행 기구, 동학교도 전체 집회 ‘도회’ 의결기구 이원화
노예와 주인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말을 높이고, 같은 마루에 동석대좌
부여지역, 도소 차려 계급간 갈등 해소·집강소 성격의 민주적 행정 시행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 백제는 538년(성왕 16)에 웅진(공주)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이후 660년(의자왕 20)까지 6대 123년 동안 이곳은 백제의 왕도로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다.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 때 옛 부여현·홍산현·임천군 전역과 석성현 일부가 통합돼 이뤄진 부여. 한 많은 역사 속에서의 부여, 부여지역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서도 ‘부여군지(扶餘郡誌)’에는 구체적인 자료가 나온다.
부여의 유생 소정 이복영(小亭 李復榮)의 일기 ‘남유수록’이 그것인데, 부여지역 동학농민혁명 초기의 활동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일기는 이복영의 나이 스무 살 때(1889)부터 65세(1934)까지 매일 써온 평범한 일기지만 동학농민혁명 시기의 정황이 아주 구체적이어서 당시 동학교도와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을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일기에는 대방면에 집강소가 설치됐고, 집강소를 통해 주요한 지방 행정이 집행됐던 사실 등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여읍 중정리, 가탑리, 능산리, 염창리 일대의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일기에 따르면 부여 대방면 지역에 동학농민군이 포접(包接) 조직을 설립한 것은 6월 말에서 7월 초순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 동학교도들의 혁명적인 포접 활동
부여지역의 포접 조직 설립 시기인 6월 27일경 전라도 함열을 거쳐 금강을 건너 북상하던 동학농민군은 부여, 임천, 홍산, 석성 등지에서 지역의 동학 세력과 일반 농민들의 호응을 얻는 가운데 확대해 나간다. 부여지역의 포접 조직의 총본부는 7월 12일 대방면 중리(현재의 부여읍 중리)에 위치한 민 참의 집 뒤뜰에 설치됐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산상에 차일을 치고 주문을 통송 하거나, 마치 군대처럼 방포하면서 진을 익히는 등 위세를 과시했다고 전한다. 당시 대방면 동학농민군은 ‘부여군아’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보수 유학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상태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부여지역의 포 조직은 정치 조직인 동시에 군사 조직이었고, 여기에 장용한, 최천순(崔天順), 송천순(宋川順)과 같은 접주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당시 접주들은 대방면 중리 사람으로 “동학 교도들은 대방면 사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고리대 문제는 물론 국전(國典)의 여러 조항들을 운운할 정도로 세상 물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대방면 포에서는 각종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전체 집회 격인 ‘도회(都會)’를 열어 포 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예를 들면 동학 접주와 ‘민씨 가’를 비호한 문제가 발생하자 동학교도들은 도회를 열어 대방면 접주의 전횡을 비판하기도 했고, 대방포의 위치를 인근의 가속 시장거리(佳束; 가탑리의 작은 자연촌락)로 옮길 것을 결의하기도 한다. 이로 볼 때 대방면 포접의 권력 구성은 접주와 접사로 이어지는 실무 집행 기구와 동학교도들의 전체 집회인 ‘도회’라는 의결기구로 이원화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속 시장거리에서 개최된 도회의 주요 구성원을 보면 도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동리의 상민(常民), 성만(性滿; 천민 이름으로 보임), 업성(業成; 머슴 이름으로 보임), 교정(較丁; 가마꾼), 노예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로 볼 때 도회는 이른바 원민 계층인 천민을 중심으로 구성돼 집행됐던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동학교도 지배에 들어간 시기의 부여 사회는 양반을 정점으로 편제되던 기존의 향촌 질서와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실례로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토호 양반이라도 횡포한 양반으로 지목되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거나 일정한 부역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예와 주인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말을 높이고, 같은 마루에서 동석대좌(同席對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본질적인 동학 이념의 실천인 셈인데, 당시 대방면 동학교도들이 추구했던 일은 반족(班族)을 능욕(凌辱班族)하거나 재산 빼앗기, 노예들을 양인으로 바꾸기, 산송(山訟; 묘지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고리대 관행, 고용 관행, 소작 관행 개선 등 봉건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을 이용한 횡포를 타파하는 혁명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동학교도들은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국전(國典), 즉 나라의 법질서를 어느 정도 참조하기는 했으나 굴총(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 고리대 변제 거부, 지세와 소작료 불납 등 국법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활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동학교도의 위세에 눌린 양반들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정해놓은 법을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 재물을 바쳐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비록 넉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의 집강소 활동이었지만 이런 동학교도의 혁명적인 포접 활동은 부여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기록됐다.

■ 동학교도, 도소 차려 계급간 갈등 해소
부여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여현, 임천군, 홍산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부여지역에는 1894년 이전부터 접주 이석보, 장봉한, 최천순 등의 동학교도들이 부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부여지역은 갑오년 6~7월에 동학교도가 도소를 차려 계급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등 집강소 성격의 민주적인 행정을 시행했는데, 이는 부여지역만의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
부여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94년 6월 말에서 7월 초 경으로 추정된다. 이때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금강을 건너 임천, 홍산 등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임천 수령에게 임천 지역의 관리가 전라도에 사는 여인을 강제로 범한 책임을 추궁하며 말과 무기를 빼앗았다. 또 탐욕스럽고 포학한 부자들을 징계해 다스리고 가난한 백성을 구호한다는 명목으로 조 271석과 쌀 15석, 소 한 마리와 돈 150냥을 가져갔다.
이 소식이 부여지역에 알려지자 동학교도들은 큰 힘을 얻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부여, 임천, 홍산 등지에서 동학 세력과 일반 농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포접을 형성할 정도로 규모가 큰 조직을 갖추게 됐다. 7월 초에는 접주 이석보가 부여지역 곳곳을 순회하면서 활동했고, 대방면에 도소가 설치돼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이를 통해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부여지역 동학교도들은 서로를 평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비록 노비일지라도 동학에 들어오면 반드시 존대해 서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양반이라도 동학교도들에게 원한을 사면 반드시 보복을 당했다. 동학교도들은 무리를 지어 무장을 하고 예전에 양반들에게 빼앗긴 재산을 되찾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비록 부여지역에서의 집강소 활동은 채 반년을 넘기지는 못했어도 이러한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은 부여지역에서의 특징이었고, 동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실현을 위한 실천이었던 셈이다.
7월 5일에는 임천의 동학교도 18명이 총과 칼을 지니고 정산현 관현면 신대리에 사는 진사 조창하를 찾아갔다. 이들은 달아나는 조창하를 때려 숨지게 하고 물건을 약탈하기도 했다. 7월 6일에는 접주 이석보의 방문으로 도사 민경호의 집안사람들과 마을의 상민들이 동학에 입도했다. 7월 12일에는 동학농민군들이 대방면 중리의 민 참의 집 뒤뜰에 도소를 설치하고, 산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한 포장(차일)을 겹겹이 치고 주둔하면서 총을 쏘며 진법을 훈련했다.
이때 동학의 경전을 읽고 주문을 외는 소리가 사방 멀리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이어 7월 24일에는 동학농민군들이 모임의 총회를 열고, 접주 장용한과 최천순이 백성을 괴롭힌 민 참의가 사사로이 도와주는 것을 규탄했다. 결국, 가속 시장거리로 포를 옮기기로 결의했고, 그 무렵 전봉준과 손병희는 남북접의 연합전선을 형성해 전면적인 대일항쟁에 나서기 위해 논산에 집결했다. 일부 유생들도 농민들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다. 도사를 지낸 이유상은 건평에 있던 유회군 1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으로 가 전봉준과 합세했다.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자 부여지역의 동학농민군도 2차 봉기에 참여했다. 10월 29일에는 부여지역 동학농민군 500여 명이 부여 관아를 공격해 전쟁에 쓸 무기를 확보했다. 이들은 민가에서 옷, 이불, 소 등을 획득해 능산리를 거쳐 논산으로 이동했다.
1894년 11월 초순, 홍산지역 동학농민군은 홍산 관아를 점거했다. 이때 서산군수 성하영이 관군을 이끌고 홍산 쪽으로 갔다. 그는 11월 17일 공주를 떠나 이인에서 하루를 묵은 뒤 18일에 부여에 도착했다. 19일에 부여를 떠나 홍산에 도착했으나, 이미 홍산에는 동학농민군이 없었다고 전한다. 홍산 고당리에서 최상묵과 전묵진을 붙잡아 포살했다.
부여지역은 우금티 전투가 벌어진 공주와 가까이 있다. 따라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와 연결돼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차 봉기와 2차 봉기 사이에 이른바 도소를 통해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것도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점이다. 대체로 충청도 지역은 1차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2차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부여를 비롯한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1차 봉기와 2차 봉기 사이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부여 출신인 조원상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후 천도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조원상은 3월 3일 부여에서 황우열에게 조선독립선언의 취지를 듣고 독립선언서 5매를 받아 2매는 부여 중정리와 염창리 노상에 배포했고, 나머지 3매는 같은 날 5시경 김덕빈에게 주면서 배포를 부탁하는 등 부여지역의 3·1독립운동을 이끌어 7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또한 이종선은 1889년 갑진개혁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으며, 이후 천도교단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다가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