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과 유림 연합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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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과 유림 연합 ‘창의’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10.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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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7〉
논산 황화대 동학농민군 전투지 전경.
논산 황화대 동학농민군 전투지 전경.

논산은 충남 중남부에 위치, 행정구역상 동쪽은 계룡출장소, 서쪽은 부여, 서남쪽은 전북 익산, 북쪽은 공주와 접하고 있다. 동남쪽 일대는 계룡산맥과 대둔산 줄기가 만나는 험준한 지형이나, 서북부는 남서부와 함께 해발 60m 내외의 평탄한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계룡산 줄기와 대둔산 줄기에서 발원하는 금강의 지류들이 북서쪽에서 합류해 남으로 흐르다가, 논산천에서 다시 합류, 강경에서 금강 본류와 합쳐지며 큰 강이 된다. 이 강은 지도상에서 우리나라 3대 강의 하나인 ‘금강’으로 불린다. 

‘비단같이 아름다운 강’이라는 의미다. 비단 강이 흐르고 있는 유역은 논산의 곡창지대로 지역민의 젖줄이다. 논산은 강이 흘러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곳이다. 천연적인 지형으로 강과 산을 끼고 있다.
 

논산 동학농민혁명 1년전 노성민란이 일어났던 노성관아.
논산 동학농민혁명 1년전 노성민란이 일어났던 노성관아.

■ 남·북접 동학농민군 총결집했던 곳
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2차 봉기시기에 공주전투 이후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역이다. 논산에서 남북접 동학농민군이 결성돼 공주성 전투에 나섰고, 후퇴한 동학농민군이 논산 곳곳에서 전투를 치러 진격과 후퇴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지역이다. 전라도의 전봉준을 중심으로 바라보던 동학농민혁명의 시선을 돌려 전국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맥락에서도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연구는 필요하다. 논산의 동학농민혁명은 2차 기포 시기에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이 결성된 소토산과 연산 전투, 노성 봉화산 전투, 소토산과 황화대 전투 등을 치른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조선 침략을 위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에 나섰다.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은 논산 소토산에 집결해 연합군진을 형성, 서울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관·일본 연합군에 패했다. 동학농민군의 본진은 노성에 잠시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고 새로운 진격을 준비했다. 대지휘소에서 정치적 선전 작업을 펼치는 한편, 수습된 동학농민군 두 정예부대를 투입했다. 

연산 전투에는 청주에서 패하고 내려온 김개남군이 합류함으로써, 우금티 전투 이후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이자 가장 큰 규모의 전투로 기록됐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된 관·일본 연합군에 패했고, 계획했던 전투 전략을 변경하는 계기가 됐다. 동학농민군은 관·일본 연합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노성 봉황산을 거쳐 논산 소토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소토산은 남북접 연합군이 새 진영을 펼치고 대지휘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관·일본 연합군이 신식무기를 앞세워 소토산을 향해 세 방향에서 압박해 오자 동학농민군은 방어에 더 유리한 인근 황화대로 다시 진을 옮겨 항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구식무기에, 사기마저 꺾인 동학농민군에게 전투다운 전투는 수행하기 어려웠다. 전열이 삽시간에 무너지며, 서둘러 전주 방면으로 퇴각했다. 동학농민군은 원평 전투와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다. 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은 가혹한 토벌전에서 희생됐다.

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2차로 봉기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총결집했던 곳이다. 4000여 명에서 출발한 전봉준의 군대가 논산에서는 10만 대군으로 불어난 것이 이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일이 논산에서 가능했던 것은, 논산이 그만큼 동학에 대해 우호적이었음을 방증하는 증거다. 동학은 사농공상을 부정하며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의 기치를 들고 나왔다. 

당시 기득권층이던 유학자, 양반들에게 정면 도전하는 이 사상을 양반들이 반겼을 리 만무한 일이다. 동학을 궤멸시키다시피한 세력은 외부세력, 즉 일본군이었다. 이전엔 동학의 가장 큰 적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士林)이었지만 논산 노성의 유림들은 동학을 그렇게 핍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동학을 환영하지도 않았지만 탐관오리들의 작태가 심하니 그런 세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못 본 체하거나 동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논산 동학농민혁명때 적선덕에 소실위기 넘긴  명재윤증고택.
논산 동학농민혁명때 적선덕에 소실위기 넘긴 명재윤증고택.

■ 노성민란, 동학농민혁명의 뿌리
논산의 노성민란(魯城民亂)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노성 현감의 탐학 행위에 반발해 논산지역 농민들이 일으킨 민란이다. 노성민란은 전운소(轉運所; 조세 양곡의 뱃길 운반을 맡아보던 지방관아)에서 운송하다 남은 미곡 400석 중 200석을 전 노성 현감이 착복했는데, 1893년에 부임한 현감 황후연(黃厚淵)이 농민들에게 이 200석을 대신 물어내도록 하자, 이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이다. 

농민들은 장두(狀頭) 유치복(兪致福)이 중심이 돼 여러 차례 민회(民會)를 개최했고, 이의 시정을 위해 정소(呈訴; 관청에 소장을 냄)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봉기해 관아를 점령하고 황후연을 쫓아냈다. 민란의 주모자들은 유치복을 비롯 윤상건(尹相健)·박관화(朴寬和)·이성오(李成五)·윤상집(尹相執)·윤성칠(尹成七)·윤자형(尹滋馨) 등으로, 노성 지역 대표적 종가인 파평윤씨 노성종중에서 상당수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성민란이 발발하자 충청감사는 민란을 조사한 뒤 주모자들을 처벌하고자 했지만, 주모자들이 모두 피신해 처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백화서(白化西)만 주모자에 동조했다는 죄로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살기가 어려운 섬) 유배라는 중형에 처해 졌다. 충청감사는 주모자 이외에도 노성 지역 향촌 사회의 주도 세력인 좌수 양주흥(梁柱興)을 비롯해 이방(吏房) 이석민, 대동색(大同色) 김제흥·이민학, 창색(倉色) 김광오, 교유(校儒) 김재용·박응진, 면임(面任) 윤원근·송세진·김상규·이사성·박준필·김자현·김영배·김준백 등을 처벌했다. 민란을 야기한 노성 현감 황후연은 의금부에 투옥돼 관직을 박탈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양반들로 구성된 주동자들이 전임 수령의 부정과 징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통문을 발하고, 민회를 개최하는 등 정소(소장을 관청에 냄)운동 단계부터 파평윤씨 노성종중에서 대거 참여한 점이 특이하다.

1893년 12월에 발생한 노성민란의 여운이 남아있을 시기인 1894년 8월, 노성 지역의 파평윤씨와 각별한 관계였던 송정섭은 동학교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노성의 윤자신에게 전달할 밀지를 가지고 왔다. 송정섭은 이들과 함께 기포하고자 했다. 송정섭은 파평윤씨의 재궁(齋宮)인 정수암(靜修庵)을 거점으로 활동했는데, 9월 초 정수암에 들른 면암 최익현에게 ‘국왕이 창의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참여를 부탁해 의병을 구성했다. 의병의 지휘는 고산(高山)의 윤 진사로, 종사관들은 모두 만석지기 부자들이었다.

한편 최익현이 돌아간 뒤 송정섭은 창의를 권하는 윤음을 가지고 동학 12포(包)를 순시했고, 이를 계기로 각지의 동학농민군 조직과 유림 간 연계가 됐다. 또 파평윤씨와 인근 사대부들도 정수암에 빈번하게 출입했고, 부호들은 양식을 출연했다. 밀지의 진위여부를 확인한 노성 현감 김정규도 쌀을 내놔 의병의 거의에 도움을 줬다. 이렇게 노성 인근의 보수 유림, 수령, 동학농민군이 연합해 창의를 준비했으니 이는 당시 외세에 저항할 효과적인 대응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기포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흩어졌으나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세력들이 나라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자 연합 의병을 결성하려 했던 시도는 논산지역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논산 동학농민군 남북접 연합군 집결지, 소토산(대도서터).
논산 동학농민군 남북접 연합군 집결지, 소토산(대도서터).

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2차 재기포 시기 이전인 1894년 8월에 이인(利仁)의 동학 도집강(都執綱) 김창순(金唱順)이 노성현의 동학도들을 이끌고 노성 현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다. 9월 기포 이후 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투쟁 활동은 주로 소규모로 진행됐는데, 6~7명의 교도를 거느린 접주가 두령이 되거나 때로는 수십 명의 동학도로 구성됐다. 특히 연산의 박영채(朴永采) 접주와 은진의 염상원(廉相元) 접주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9월 재기포 시기가 되자 은진 지역에서는 은진 현아를 습격해 현감 권종익을 체포하기도 했다.

1894년 9월 13일, 전라도 삼례에서 재봉기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무장을 하는 동시에 충청지역의 동학농민군과 연합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주둔했다. 9월 18일 재기포가 선언되자 전봉준은 10월 11일 삼례를 출발해 북상한다. 전봉준은 논산 연합지역을 보위하기 위해 10월 6일쯤 선발대를 파견해 은진현을 점령하고, 한밭까지 진출했다가 충청감영군 80여 명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의기충천한 전봉준은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인솔해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했다. 전봉준은 먼저 국문 격서(檄書)를 통해 경군(京軍)과 충청감영군에게 일본으로부터 유린당하고 있는 국가 안위를 알리고,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는 고시문을 발표한다. 고시문에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은 서로 도(道)는 다르지만 일본침략군을 반대하는 척왜(斥倭)와 척화(斥華)는 그 뜻이 동일하니 조선사람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이 연합, 척왜척화해 조선이 왜국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함께 구국 투쟁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한편 충청 호서지방의 동학농민군은 2대 교주 최시형의 명에 따라 충청, 경기, 강원 등 각지에서 봉기, 보은 장내리 동학대도소에 집결한 뒤 대통령(大統領) 손병희의 인솔로 논산을 향해 출발한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해 결의형제를 맺는 한편,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논산 소토산(小土山)에 대본영을 설치한다. 소토산의 위치를 두고 이견이 있지만, 평야지대인 논산에서 어느 특정한 산을 지칭하기보다는 ‘작은 흙산’이라는 보통 명사의 지역으로, 정황상 천주교회가 들어선 당재가 유력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도 확실하지는 않다. 

당시 연합군은 10만 혹은 20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2만 명 설이 유력하다. 10월 17일, 전군의 두령들을 모아 작전계획을 세우고, 동학농민연합군은 20일 미명을 기해 공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경천 방면으로 진출한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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