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신자 첫 순교자 윤지충·권상연, ‘진산성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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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신자 첫 순교자 윤지충·권상연, ‘진산성지성당’
  • 취재단=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학생기자단
  • 승인 2024.10.2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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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순례길 신앙의 요람지를 가다〈13〉
국가등록문화재 제682호 진산성지성당. 작은 사진은 진산성지성당 새 성전 전경.
국가등록문화재 제682호 진산성지성당.

지금의 충남 금산군은 조선 시대의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이 1914년 통합된 곳이다. 

금산과 진산은 백제 시대 이후 전라도이기도, 충청도이기도 했던 곳이다. 고종 32년(1895) 8도(道)의 지방행정 구역을 23부(府)로 개편할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전라북도에 편입됐다. 하지만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는 줄곧 전라도 땅이었던 진산군은 1914년 금산군에 병합됐고, 금산군은 1963년에 충청남도에 편입됐다.

우리에게 진산이라는 땅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래도 ‘진산사건’ 때문일 것이라고들 한다. 역사책은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이라는 선비가 천주교 교리에 따라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라고 적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가 된 두 사람은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듯 전라도 천주교의 발상지와도 같은 고장이니 ‘충청도 진산’이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는 곳이다.

하지만 충청도 진산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이 충남 금산의 진산과 전북 완주 운주면, 충남 논산 벌곡면에 걸쳐 있다. 진산은 해발 878m의 대둔산 동쪽 기슭에 아늑하게 파묻혀 있는 청정지역이며, 게다가 농사지을 땅이 제법 넓어 보이니 살기 좋은 고을일 수밖에. 지금은 진산을 품고 있는 금산이 전국 제일의 인삼생산지로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으며, ‘금산세계인삼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새 진산성지성당의 어머니상. 윤지충·윤지헌 복자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두 아들과 조카 권상연 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 형상화.
새 진산성지성당의 어머니상. 윤지충·윤지헌 복자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두 아들과 조카 권상연 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 형상화.

■ 진산성지, 천주교신자 첫 순교자 모셔
한국 천주교신자의 첫 순교자는 1791년 진산(珍山)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처형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다. 그들은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이를 계기로 이승훈·권일선·최필공 등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이어서 1795년 을묘박해로 이가환·정약용·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당하는 등 천주교의 일대 수난이 시작됐다.

1759년 윤지충(바오로)이 태어난 진산은 전라도(현재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속해 있었다.  25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1707년 친척인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야고보)은 1751년 진산에서 태어났고, 고종사촌인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내외종 간이다.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자, 윤두서의 증손이다. 1784년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김범우의 집(후에 명동성당 터)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접하고, 고종사촌인 정약용 형제의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진산사건)’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천주교 예법으로 장례를 치렀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오후(신시·辛時, 3~5시 사이)에 전주 남문 밖(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 안동권씨의 모친상을 당해 교회의 가르침대로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우는 등 유교식 예법을 거부하는, 당시에는 사회의 패륜아로 받아들여졌다.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한 조정의 지침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의 반열에 올렸다. 5월 29일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의 복자들은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복자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했다고 한다.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기념비.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기념비.

■ 진산성지, 어머니의 삶을 담은 성지
지금 금산의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흔적을 찾으려면 진산성지성당으로 가야 한다. 조촐함의 극치여서 더욱 아름다운 진산성지성당은 프랑스인 파르트네 신부가 1926년에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지방리 공소 시절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종탑의 모습이 지금과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1983년 종탑을 개조하면서 다른 성당들처럼 제단과 마주 보는 정면에 출입문을 새로 냈다고 한다.

처음 지을 당시 성당에는 남동쪽에 남성용 출입문, 북서쪽에 여성용 출입문이 있었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쓰이지는 않지만 두 개의 출입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당은 한식 목조구조의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가운데 신랑(身廊)의 좌우로 나무 기둥을 세워 측랑(側廊)을 상징하도록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양식인 3랑(廊) 구조의 바실리카를 소박하게나마 재현한 것이다. 정면에서 볼 때 제단 오른쪽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순교자를 기리는 교회답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 진산성지성당은 지난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제682호)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진산성지성당 앞 잔디밭에는 두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각각 세워졌다.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두 사람을 기린다고 한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친척들은 처형된 지 9일 만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당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이처럼 지극히 흉악하고 패륜한 일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맑게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양적(兩賊)은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대시(不待時; 때를 기다리지 않음)로 참형에 처하고 5일 동안 효수함으로써 하여금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과 사학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대시’란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사형은 추분까지 기다려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중죄인은 예외였다고 한다. ‘강상’은 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한다. 형조에서 이렇게 진언하자 정조는 “전라도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여 쉰세 개 고을의 제일 끝에 두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이 그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감히 관청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먼저 적발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할 수는 없다.…해당 군수는 먼저 파직하고 이어 잡아다가 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토록 하라”고 했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죄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는 해도 진산으로 옮겨와 제대로 무덤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덤뿐 아니라 두 순교자가 살던 집이 어디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 이후 두 사람의 집이 헐린 것은 물론 집터는 연못이 됐다고 한다. 집터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두 사람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진산성지성당’의 중요성은 커진다.

윤지충의 6대조는 고산 윤선도이고, 증조부는 ‘자화상’으로 알려진 화가 공재 윤두서다. 윤지충에게 가톨릭 교리를 알려 준 사람은 다산 정약용 형제라고 한다. 다산에게 고산은 외가 쪽으로 6대조가 된다. 그러니 윤지충과 다산도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다. 권상연은 윤지충보다 여덟 살이 많은 외사촌이다. 모두 천주교로 얽힌 집안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이 정조 8년(1784)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최초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직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양반가의 젊은이 사이에 천주학이 유행처럼 번지는 분위기에 걱정스러운 시선은 상당했다. 하지만 사제 파견을 요청하러 베이징에 갔던 훗날의 순교자 윤유일이 뜻밖의 소식을 전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천주교 신자는 조상에 대한 전통적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베이징교구장 구베아의 명령을 들고 온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고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렸다. 윤지충에게 신앙을 전했던 정약전과 정약용도 교회를 떠났다. 전통적 유교 윤리에 포용적이던 예수회 신부들의 저서로 천주교를 배운 초기 신자들이 ‘제사는 이단’이라는 파리외방선교회가 중국 교회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혼돈에 빠진 것으로 천주 교회사 연구자들을 보는 듯하다.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 진산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전주감영의 남문 밖 형장 터에는 1914년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진산성지의 중심은 단연 ‘어머니’라고 입을 모은다. 새로 건립한 새 성지성당에서 가장 높은 곳 한가운데 설치된 ‘순교자 상’은 ‘어머니의 삶을 담은 성지’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윤지충·윤지헌 복자의 어머니인 안동권씨가 두 아들과 조카 권상연 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 안에 성모님의 삶이 담겨있듯 복자들의 순교 정신 안에는 어머니의 신앙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지의 넓은 마당 한가운데 있는 피에타상은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7일 봉헌식이 열린 새 성당의 건물은 2021년 복자들의 유해가 발굴된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순교자 무덤의 배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성전은 왼편 윤지충 복자 묘소 자리에, 전시실은 오른쪽 권상연 복자 묘소 자리에, 강의동은 전시실 아래 윤지헌 복자 묘소 자리에 마련됐다고 한다. 마당에는 십자가의 길이 남쪽과 북쪽에 각각 7처씩 세워졌다. 성전에는 15처를 의미하는 부활하신 ‘예수님 상’이 설치돼 연결성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제대를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세 복자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고 한다. 성지 어느 곳이든 거룩한 분위기와 복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대전교구 진산성지(주임 김용덕 야고보 신부)는 지난해 5월 27일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57-8 현지에서 교구장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봉헌식을 열고 복자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윤지헌(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안치했다.
 

진산성지성당 새 성전 전경.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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