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국 최초 기포지·최후 항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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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국 최초 기포지·최후 항전지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10.3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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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18〉
금산 소라니재 전투지, 금성면 진산면 접경 고개 일대.
금산 소라니재 전투지, 금성면 진산면 접경 고개 일대.

금산지역의 최초 기포, 3월 8~12일 금산 제원장터·진산 방축리에서
동학농민군 진산군 주둔, 금산군 양반 유생, 보부상, 향리 위기의식 
금산, 동학농민군 세력보다 반동학농민군 세력 강성지 ‘집강소 설치’
일본군 우세한 화력, 11월 10일 금산에 진입·12일에 진산까지 장악

금산지역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은 고부에서의 봉기가 점차 약화되고 전봉준이 무장에서 봉기하기 직전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들이 전국 최초로 기포한 지역이다. 동학농민군과 보수 유림세력과의 공방전이 어느 지역보다 치열했던 지역으로도 꼽힌다. 지금의 금산군은 1914년 3월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산군과 진산군을 통합해 만들어졌다. 
 

금산 제원기포지. 원래 제원역 터였으나 현재는 제원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금산 제원기포지. 원래 제원역 터였으나 현재는 제원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 금산, 양반 유생 중심의 민보군 결성 
‘금산군지’에 따르면 “금산지역에서는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제원역에 회합해 이야면(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000여 명이 죽창과 농기구 등을 들고 금산읍에 쳐들어가 관아를 습격,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胥吏; 관아에서 말단 행정 실무를 맡아보던 사람)들의 가옥을 파괴했다”는 기록과 ‘오하기문’에 “3월 12일 동학도 수천 명이 제원역 장터에 모여 몽둥이로 무장, 흰 수건을 두르고 읍으로 몰려가 관리들의 집을 불살랐다”라고 하는 기록으로 볼 때 금산지역의 최초 기포는 3월 8일이나 3월 12일, 금산 제원장터와 진산방축리에서 했다. 고창 무장에서의 기포(3월 18일)보다 10일 정도 빠른 시기다.

금산지역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은 3월 8일과 12일 동학농민군들이 제원역에 모여 죽창과 농기구 등을 들고 금산읍으로 몰려가 문서와 기물을 불사르고 김원택(金源宅) 등 금산군 향리들을 징치하고 가옥을 불사른 후 금산군수에게 폐정개혁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금산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서장옥이었다. 서장옥은 제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 이끌던 교단조직과는 다른 노선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1892~1893년 교조신원운동과 외세배척 운동을 전개하면서 전봉준‧김개남‧손화중‧김덕명 등 전라도의 혁명적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적 농민봉기를 주도했다.

서장옥과 연계된 동학농민군은 금산봉기 직후 진산군 방축점(防築店: 현재의 진산초등학교와 300m거리)에 동도소(東道所)를 설치하고 주둔했다. 이후 서장옥 직할 부대는 전라도 부안으로 이동해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본대와 합류하고, 충청도 회덕과 진잠, 옥천지역에서 온 동학농민군은 출신 지역으로 돌아갔으며 진산군 출신들은 방축점에 남게 됐다.
 

금산 동학농민혁명 진산 방축리 봉기 터 일원.
금산 동학농민혁명 진산 방축리 봉기 터 일원.

동학농민군이 진산군에 주둔함으로써 금산군의 양반 유생과 보부상, 향리 등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 4월 2일 금산군 보부상 접장이었던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은 보부상과 읍민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진산 방축점으로 가서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해 114명 이상을 살해하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진산 출신 동학농민군들은 이후에도 계속 진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집강소 시기 진산 동학농민군은 격파됐지만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점차 세력을 확대해 황토현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장성에서 서울에서 파견된 중앙군을 격파하고 4월 27일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전주성을 포위한 관군과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에 놀란 정부의 요청으로 청으로부터 파견한 군사가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 역시 이를 틈 타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전봉준은 나라의 앞일을 생각해 동학농민군들의 요구를 담은 폐정개혁안을 제출, 관군과 5월 7일 화약을 체결하고 전주성으로부터 물러났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6월부터 9월 초순까지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통치 권력을 장악하고 동학농민군의 힘으로 부패한 행정을 개혁해나갔다.

진산군에도 집강소가 설치됐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진산군 접주 진기서(陳基瑞)가 진산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면서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의 경우는 동학농민군의 세력보다 반동학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한 지역인데도 5월 15일 경 집강소가 설치됐다. 집강으로는 처음에 용담군에 거주하던 김기조, 다음에는 금산군에 거주하던 조동현이 임명됐다. 그러나 이 집강소 활동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5월 중순 이후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민보군(民堡軍)이 결성되고 이들이 금산지역 치안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금산 동학농민혁명 제원장터 봉기지.
금산 동학농민혁명 제원장터 봉기지.

금산에서 민보군 결성을 주창한 사람은 금산군 향리였던 정지환(鄭志煥)이었다. 그는 다른 향리들과 논의하고 금산읍과 떨어져 살고 있던 금산군의 유생 고제학(高濟學)과 박승호(朴勝鎬), 전 첨사 박항래(朴恒來) 등과 의논해 전 참판이자 전임 금산군수였던 정숙조(鄭翽朝)를 맹주로 추대하고 민보군을 결성했다. 여기에 4월 2일 진산 동학농민군 공격을 주도한 김치홍과 임한석 등 보부상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고제학은 동학농민군을 중국 고대 황건적 무리에 비유하면서 이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군내 인사들이 힘을 합쳐 ‘옳은 것을 지키고 사악한 무리를 물리칠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띄워 한 달 만에 6000여 명을 규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제학은 같은 스승의 문인인 박승호와 더불어 의회장(義會長)이 되고 정숙조(鄭甗朝)를 맹주로 추대했다. 그리고 포장대(炮隊長) 정두섭(鄭斗燮), 무대장(武隊長) 정지환(鄭志煥), 참모사 양재봉(梁在鳳)과 신구석(辛龜錫), 호군감(塙軍監: 군비 조달직) 한홍규(韓弘圭)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이때 병력은 포대장 휘하 포사 300명, 무대장 휘하 무사 700명, 민병 1000여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금산지역은 양반 유생 중심의 민보군이 장악한 반면 진산군은 동학농민군이 장악해 대치하는 국면이 10월까지 지속됐다.
 

금산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금산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 동학농민군, 군사적 우세로 금산 점령
전주화약이 체결돼 동학농민군이 해산했으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 6월 21일 왕궁을 침범, 대원군을 앞세워 개화파 정부를 수립하고 갑오개혁을 추진케 하면서 이틀 후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 중순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조선 정부군과 연합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동학농민군 내부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재봉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전봉준은 9월 13일 전라도 53개 군현에 재봉기 격문을 돌리고 동학 교주 최시형과 연락해, 산하의 충청‧경기‧강원‧경상‧황해 등 동학 조직도 봉기하게 했다. 이로써 9월 중순경부터 동학 조직 전체가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최시형 산하 조직 중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10월 중순경 전봉준의 남접군과 논산에서 합류했는데, 그 수는 5만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은 병력을 나눠 천안‧홍주‧예산‧공주‧남해‧광주‧나주 등으로 배치한 후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부대 2만여 명이 10월 하순 논산에서 북상해 공주 근처 이인‧효포‧대교 등에 포진했다.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왕성했으나 그 무기는 대부분 화승총과 창검류가 대부분이었다.

공주를 둘러싼 공방전은, 10월 22일 동학농민군이 공주의 전초기지인 이인역을 공격 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대교‧효포‧웅치에서 격전이 전개됐는데, 지리적 이점을 점한 정부군과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의한 집중사격과 포위 작전으로 동학농민군은 경천점(敬川店)으로 후퇴했다.
 

금산 진산성지성당.
금산 진산성지성당.

11월 8일부터 시작된 동학농민군의 2차 공격에서는,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후 방어선인 공주 우금티를 빼앗기 위해 7일 동안 40~50회에 걸친 돌격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빈약한 화력과 군사적 훈련의 부족으로 인해 일본군과 관군의 우월한 화력과 전술 앞에 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도망함으로써, 논산으로 후퇴했을 때는 잔존자가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전봉준 부대는 퇴각하면서 논산과 금구 등지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11월 27일 전라도 태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전봉준은 순창으로 남하해 재기를 꾀했지만 12월 2일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됐고, 1895년 3월 하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 동지들과 함께 처형됐다.

이후 10월 22일, 김개남의 금산 공격에는 진산‧고산‧영동‧옥천‧무주‧연산‧공주‧강경의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참여했다. 최초의 전투는 10월 22일 진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부수암(浮水巖)’에서 벌어졌다. 민보군이 주력이던 무대장 정지환과 포대장 정두섭, 호군감 한홍규는 금산과 진산의 경계인 ‘송원치(松院峙; 소라니재)’를 방어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부수암 주위를 둘러싼 상태에서 계략을 써 민보군 일부를 부수암 쪽으로 끌어내 포위 공격함으로써 승리를 거뒀고, 민보군 측 사상자가 10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같은 날 금산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금성산과 삽치(揷峙), 민치(民峙) 등 세 곳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10월 22일 정오 무렵부터 24일 오전 10시경까지 이틀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됐다. 동학농민군은 군사적인 우세를 점해 결국 금산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민보군 맹주 정숙조, 포대장 정두섭, 무대장 정지환, 호군감 한홍규 등과 금산군민 100여 명이 피살됐다. 특히 맹주 정숙조는 생포돼 제원역 남문 밖으로 끌려가 모욕을 당하고 처형당한 후 시체까지 불태워졌다.
 

금산 관아터. 현재는 금산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금산 관아터. 현재는 금산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김개남 부대는 금산 점령 이후 11월 9일까지 약 보름간 머물면서 각종 문부를 없애고 향교와 관청 등을 모두 파괴했으며, 곡식과 돈, 우마와 의복 등을 모두 군수물자로 탈취했다. 금산군에 있던 민가 400~500호가 거의 불타 그해 말 겨우 80호만 남았을 정도로 파괴됐다. 이들은 11월 9일 금산을 떠나 다음날 진잠군을 점령하고 회덕과 유성을 거쳐 11월 13일 새벽 청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먼저 도착해 있던 일본군 부대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김개남 부대는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들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진잠과 연산, 진안과 고산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였으나 각 지역의 향리와 주민,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김개남은 11월 말 전라도 태인현 산내면에서 체포돼 12월 3일 재판 과정 없이 곧바로 처형됐다. 김개남 부대가 금산을 떠나기 전후에 금산 인근에서는 진격해오는 일본군과 두 차례 격전을 벌였다.

11월 8일 영동과 양산 부근에서 동학농민군 1000여 명이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금산 쪽으로 퇴각했다. 11월 9일 금산으로 진입하려던 일본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한나절 동안 전투가 벌어졌으나 동학농민군은 또다시 패퇴해 진산과 고산, 용담 쪽으로 분산 퇴각하면서 동학농민군 6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은 11월 10일 금산에 진입했고, 12일에는 진산까지 장악했다. 

금산과 진산의 농민군 25명은 대둔산에 머물면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마침내 이듬해 1월 정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모두 전사, 금산의 동학농민혁명은 끝이 났다. 금산은 동학농민혁명군 최초의 기포지이자 최후까지 저항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끝>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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