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면 외라2리 돌담마을

덕숭(德崇)·수덕(修德)과 함께 덕산(德山)은 ‘3덕(德)’이 모인 곳
덕산면 외라리(外羅里), 일명 바깥나바시·밧나바시라 불리는 곳
외나리 돌담, 주변에 산재한 자연석 그대로 둑과 담 쌓은 강담
전통 마을 돌담, 생활 방식 등 역사·문화·교육적 자료로도 가치
예산군 덕산면은 삽교읍과 충남도청내포신도시, 홍성군 갈산면과 연접해 있으며, 사통팔달의 충남 서북내륙의 교통요충지로 충남도청소재지와 인접해 내포문화권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삽교읍, 북쪽으로는 봉산면, 서쪽으로는 서산시 해미면, 남쪽으로는 홍성군 갈산면과 접해 있으며, 서북으로 가야산, 동남으로 수암산, 중심부에 덕숭산(德崇山)이 솟아 있으며 동편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져 덕산인의 기개를 일깨워 주는 충절의 고장, 덕산온천(德山溫泉) 등 온천관광지로 유명세를 달고 뛰면서 충남도청내포신도시와 함께 발전하고 있다.
이곳 덕산면에 소재한 덕숭산은 ‘3덕(德)’이 모인 곳이라고 한다. 덕숭(德崇), 수덕(修德)과 함께 ‘덕산(德山)’이 그것이다. 모두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덕숭산(德崇山)과 수덕사(修德寺)가 모두 덕산면(德山面)에 있으니 덕산이 ‘3덕(德)’을 모두 품은 고장인 셈이다.
■ ‘3덕(德)’을 품고 있는 덕산면(德山面)
충절의 고장 덕산의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투사인 매헌 윤봉길 의사와 충의사가 있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일제강점기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한 곳으로, 윤의사의 의거와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8년에 건립됐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 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매헌문화제가 열리며, 윤 의사의 귀중한 유품은 기념관에 전시돼 보물 제568호로 보호되고 있다.
온천관광지의 유명세에서 알 수 있듯 덕산(德山)의 대명사는 덕산온천(德山溫泉)이다. 율곡 이이는 문집 ‘충보’에서 “날개와 다리를 다친 학이 날아와 상처에 온천물을 발라 치료하고 날아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덕산온천의 역사가 여간 깊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덕산온천은 1917년 처음으로 탕을 이용한 온천으로 개장, 올해로 108년이 됐다. 지하 300m 깊이에서 43∼52도의 약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 온천수로 근육통, 관절염, 신경통, 혈액순환, 세포재생 촉진 등 많은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산군은 72만 2700㎡를 덕산온천지구로 지정, 개발하고 있다.
덕산면 사천리에는 덕숭산(해발 495m)이 수덕사를 품 안에 안고 있다. 이웃에 함께 서 있는 가야산보다 낮은데도 조계종의 7교구 본사인 수덕사가 덕숭산의 품안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선(禪)을 있게 한 곳이 바로 수덕사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산이 높다고 다가 아니요, 선풍(仙風)이 있어야 명산’이라고 했던가. 여기에 부처의 전설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명산임이 분명하다.
옛날 이곳 마을에 수덕(修德)이란 도령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덕숭(德崇)이란 낭자를 보고 반해 청혼을 했지만 여러 번 거절을 당한다. 덕숭(德崇)은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으로 청혼을 승낙한다. 수덕(修德)은 절을 지었으나 낭자에 대한 연모 때문에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 전소됐다. 목욕재계하고 다시 절을 지었지만 역시 불에 탔다. 세 번째는 부처만 생각하고 절을 지어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덕(修德)이 덕숭을 끌어안는 순간 덕숭(德崇)은 사라졌고, 그의 버선만 손에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는 바위로 변했다. 덕숭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절은 수덕(修德)의 이름을 따 수덕사(修德寺)가 됐고, 산은 덕숭(德崇)의 이름을 따 덕숭산(德崇山)이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덕숭산은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많아 ‘호서(湖西)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덕숭산의 꽃은 뭐니 뭐니해도 단연 수덕사다. 덕숭산은 몰라도 수덕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한국 불교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다. 수덕사는 다비(茶毘) 사찰로 유명하다. 불교계에서는 금강산에서 출가하고, 묘향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리산에서 깨달음을 전하고, 덕숭산에서 열반하는 게 행복으로 통한다고 전해진다.
스님들이 모두 수덕사에서 다비를 하고 싶어 한다고 하는데, 다비식 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점도 특이하다. 수덕사는 ‘한국 선(禪)의 종가’라 불리는데, 수덕사에는 큰 스님과 여러 유명 예술가의 흔적도 많다. 경허 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이 유명한데, 두 스님은 조선 말기부터 구한말 불교가 세속화하는 것을 막고 참선을 일궈냈다. 경허는 서산 부석사 등 사찰을 거쳐 해인사로 갔지만 만공은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만공 스님이 최초의 비구니 암자인 견성암을 지었지만 수덕사가 비구니 절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여성 일엽 스님이 머물렀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도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수덕사에는 대웅전에서 정혜사까지 1080개 계단이 놓여 있다.
이렇듯 덕산온천(德山溫泉)과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를 모두 품고 있어 ‘3덕(德)’을 모두 품고 있는 덕산면(德山面)은 2025년 1월 말 기준 59.74㎢ 면적에다, 인구가 6210명(남자 3032명, 여자 3178명)으로 16법정리, 28행정리, 86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 덕산면 외라2리, 아름다운 돌담마을
덕산면 외라리(外羅里)는 백제 때는 마시산군에 속했고 신라 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덕풍현에 속했다.
조선 시대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조선 시대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으로 나박소 바깥쪽이 되므로 밖나박소 또는 외나박소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점촌, 외라리, 사천리 일부를 병합해 ‘외라리’라 했다. 행정구역은 외라1, 2리로 돼 있으며, 일명 바깥나바시, 밧나바시라고도 불리는데 20여 세대 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산골마을이다.
이 마을은 가야산과 덕숭산 줄기인 나부산이 감싸고 있다. 마을 뒤편에 솟아 있는 덕숭산은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많아 ‘호서(湖西)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덕숭산과 가야산 줄기가 흘러내린 나부산 자락에 형성된 조용하고 아담한 양지마을인 외라2리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덕산에서 수덕사 입구를 지나 외나사거리에서 갈산 방향으로 직진하면 수덕초등학교가 나온다.
수덕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학교 끝 지점에서 왼쪽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외라2리마을회관이 나온다. 이 마을은 20여 가구 30여 명의 주민들이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채 현대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는 옛 돌담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는 가운데 일부 집의 돌담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마을이다.
마을회관에서 앞길과 왼쪽 길가에는 여기저기 돌담과 돌담의 흔적이 보인다. 마당의 둑을 돌로 쌓거나 담을 돌로 쌓은 모습들이다. 마을회관에서 왼쪽의 첫 집도 오래전 쌓은 돌담이 일부는 무너진 채, 일부는 온전한 채 길가를 지키고 서 있다. 그다음 집은 집 둘레를 자연석 돌담이 품 안으로 온전히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돌담이 가장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된 집은 ‘농은 박상륜 생가(農隱 朴商崙 生家)’라는 표지석에 세워진 집이다. ‘농은(農隱)’이라는 호(號)는 ‘농사를 숨어서 짓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통적으로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며 은둔한 선비들에게 사용되곤 했던 사례에서 볼 때 묘한 의미를 던지는 집이라는 생각이다. 현장을 찾았을 때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어 집이 비어있었고, 농번기라 동네 주민들을 통해 확인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이 집을 감싸고 있는 돌담은 주변에 산재한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강담으로 쌓았으며, 돌담이 품 안으로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세다. 돌담 안으로도 또 돌담을 쌓아 장독대를 가지런하게 만들었다. 또 돌담 아래로는 또 다른 돌담을 쌓고 그사이에는 연산홍이 빼곡하다. 돌담의 관리와 조경에도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이렇듯 농촌의 마을이나 산골마을에서 조차 원형을 간직한 옛 돌담과 돌담길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의 현실에서 돌담과 돌담길에 대한 보존과 정비의 필요성은 절실한 상황이다.
돌담과 돌담길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예로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생활문화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다. 특히 전통 마을에서는 돌담과 돌담길을 통해 지역의 공간 구성, 주거 형태, 생활 방식 등을 엿볼 수 있어 역사·문화·교육적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특히 자연석을 이용한 돌담과 돌담길은 따뜻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져가는 전통의 미를 복원하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경관 요소다. 옛 돌담과 돌담길이 잘 보존된 지역은 관광지로도 각광 받는다. 전통 경관은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자산이 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직접적인 기여를 한다.
옛 돌담은 그 지역 사람들의 손으로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공동체적 유산이며 정체성이다.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지역주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옛 돌담과 돌담길은 우리의 삶과 이야기가 스며든 문화유산으로 보존과 정비는 단지 과거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정체성과 아름다운 환경을 물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