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군북면 증약리·감로마을, 환평리마을의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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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군북면 증약리·감로마을, 환평리마을의 돌담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5.08.14 07:12
  • 호수 904호 (2025년 08월 14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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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유산 재발견, 옛담의 미학-돌담이 아름다운 마을〈8〉
옥천 군북면 증약리마을 돌담. 감로마을에도 옛 돌담이 일부 보존되고 있다. 

돌담과 돌담길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산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다. 누구에게나 옛 돌담과 돌담길은 추억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농산촌 마을의 풍치와 어우러진 돌담길 한편으로 물동이를 이고 나르는 아낙네, 마실가는 촌로, 자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정감 어린 모습이 아련하기 때문이다. 개발과 현대화라는 이름 아래 시멘트와 벽돌에 밀려 이제는 그 흔적만이 옛 자취를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의 흔적을 송두리째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고택과 감나무,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져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해 주는 돌담과 돌담길이 ‘추억의 명소’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당시 문화재청이 돌담길과 돌담을 문화재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옛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돌담이 이제야 가치를 인정받게 된 셈이다. 

충청지역에도 돌담이 잘 보존되고 있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관리가 잘 안 돼서 허물어지는 돌담도 많다.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돌담과 돌담길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등록된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은 곳도 복원하거나 보수 등을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되살려 지역의 명소로, 또는 관광상품화 등으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돌담길과 돌담을 국가유산청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은 향토적 서정이 남아 있는 돌담과 돌담길이 건축의 부속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갖는다고 판단해서다. 개발과 현대화 바람이 덜 탄 농산촌의 마을들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돌담과 돌담길이 원형으로 남아 있어 한국 고유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있다. 이제라도 원형을 보존하고 허물어진 것은 보수해 원형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 옥천 군북면 증약리·감로마을 돌담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는 고려 때부터 역참을 설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증약이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의종 때 북방개척에 공이 많고 봉수제도를 정비했던 서북면병마사 조진약 장군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조진약 장군은 봉수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봉수 관리에 능했다고 하는데 봉수가 설치됐던 증약리 환산의 봉수를 조 장군의 이름을 따 ‘진약’이라 부르다가 한자화(漢字化)해 ‘증약’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증약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 증약찰방역(增若察訪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증약에 설치했던 역은 꽤 규모가 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역승을 찰방이라 고치고, 전국에 538개를 뒀다. 이를 다시 40개 구역으로 나눴고 종 6품이었던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불렀다고 한다. 증약찰방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 가운데 하나로, 조선 시대까지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달령(馬達領)이라는 협곡을 지나야 했으므로 양산 순양역을 비롯해 이원 토파역, 옥천읍 가화역, 화인역, 회덕 전민역(대전) 등을 모두 관할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이곳에는 종6품인 찰방 외에 역리 355명이 근무를 했으며, 찰방비와 선정비 8기가 마을 뒷편 산기슭에 보존돼 있다. 당시 마을이 컸기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장터거리’라 해 장이 섰던 자리가 남아 있다. ‘쇠마재비’라 해 조정으로 진상하던 말을 쉬게 했다는 장소도 현재의 증약초등학교 앞 철로변쯤으로 파악된다. 또한 찰방이 거주하던 관사는 현재 증약성결교회가 있는 자리로, 교회안에 주춧돌과 말매기돌, 중수상량문 원본이 보관돼 있다. 옥천~대전 간 국도변에는 ‘증약찰방역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증약리마을 주변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그 사이에는 증약천이 흐르고 있다. 증약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주거지가 나눠 형성돼 있다. 개천을 따라 양쪽으로 놓인 마을 도로를 따라가면 ‘감로마을’과 ‘비야마을’에 이른다. 이 마을에서도 흔치 않은 돌담을 발견할 수 있다.

증약리 돌담은 증약마을과 감로마을에 쌓인 돌담인데, 주변의 돌, 혹은 개천에 내려온 막돌로 쌓은 담장으로 ‘막담 쌓기’ 방식의 잡담 쌓기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돌과 돌의 귀를 물려가며 맞물려 쌓기 때문에 균형을 맞춰 견고하게 쌓을 수 있다. 증약리 마을의 돌담은 주로 집의 담장으로 쌓은 곳이 많으며, 때로는 밭담이나 축대로 쌓은 곳도 보인다. 어떤 집은 돌과 시멘트, 몰타르 등을 이용해 돌담을 쌓은 집도 있고, 강돌로 맞물려 쌓은 돌담도 있다. 감로마을의 어느 집 돌담은 충북 회인 지방에서 주로 돌담을 쌓는 두께 2cm 내외의 얇은 판석부터 두꺼운 판석의 점판암 돌로 쌓은 돌담도 눈에 들어온다. 점판암은 아주 오래전 진흙과 같은 작은 알갱이들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 열과 압력으로 변성되면서 만들어진 암석으로 색깔은 검은색을 비롯해 다양하다고 전해진다.
 

옥천 군북면 환산리마을 돌담.

■ 옥천 군북면 환평리마을 돌담
충북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마을은 대청댐으로 수몰돼 환산(또는 고리산, 581.4m) 기슭의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환산’은 ‘고리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고리를 한자화(漢字化)하면서 고리 환(環)자를 써서 ‘환산’이라 했다. 현지 주민들은 환산보다 고리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 산에는 백제 때의 유명한 환산성지(環山城址)가 뚜렷이 남아 있고 정상에는 환산봉수지(環山烽燧址)가 남아 있다. 군북면의 남단 중앙부에 위치하며 환산 중턱의 산간약초마을로도 유명하다. 면적은 2.14㎢이다. 동쪽은 지오리, 남쪽은 이백리 남부, 서쪽은 증약리, 북쪽은 추소리에 접하고 있다. 

환평리(環坪里)는 원래부터 군북면 환평리라 불리던 마을이었으나 지오리를 분구해 오늘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환평리에 82호가 살았으며, 1891년의 기록에도 67호가 살았는데, 이때의 환평리는 지금의 지오리(支五里)까지 관할 했다. 1908년 군, 면 조정 때에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눴는데, 이때 환평리는 일소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개편 때에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해 다시 군북면이라 고치면서, 지오리와 환평리로 나눴다. 환평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뒷산이 바로 백제의 제27대 위덕왕이 태자일 때 주둔했다는 환산성지(環山城址)가 있기 때문에 고리 환(環), 들 평(坪)자를 써서 환평리라 부르게 됐기 때문이다. 옛날의 이름은 ‘고무실’로 단일 마을인데 ‘고무실’은 ‘고리실’의 변화음은 아닌지 확실치 않다.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누대에 걸쳐 살고 있는 마을이다.

고리산은 군북면의 중심에 있는 산으로, 고리산을 끼고 사는 마을에는 ‘매는 고리가 있다’는 얘기다. 산 정상에 있는 고리는 천지개벽이 일어 세상이 물에 잠길 때 배를 묶기 위해 놓아두었다는 것인데, 환평리에서는 세상이 온통 물에 잠기면 그 고리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 환평리, 고무실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고리산을 끼고 사는 마을 중에서 환평리는 유일하게 고리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 이름을 지었다. 환평리 마을의 부근 높은 도로에서 서화천과 대청호를 바라보는 경치가 장관이라 예술인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환평리에는 국립식품의약품안전청 약초재배장이 1991년부터 입주해 있다. 

이러한 환평리는 하나의 행정구역이며 자연마을도 고무시 하나의 마을이다. 경주이씨 집성촌으로 60여 가구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고령층이 절반을 넘는다. 특산물은 환산의 산나물과 고추이며 예전에는 입담배를 경작했다고 전한다. 대청댐 수몰로 고지대로 이전한 주민들까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산비탈을 타고 조성된 이 마을에는 유독 많은 돌담이 눈길을 끈다. 마을에는 돌이 천지다. 집을 짓거나 밭을 만들 때 나온 자연석 강돌로 담을 쌓은 집들이 많은 이유다. 집담은 물론 밭담도 돌로 쌓았고, 집터를 조성하면서도 돌로 담을 쌓거나 축대를 쌓고 집을 지은 경우도 보인다. 돌이 많은 이곳에 처음 들어와 집을 짓고 밭을 일군 마을 사람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많은 농토가 대청호에 수몰되면서 논, 밭 한 평이 아쉬웠던 당시에 어쩌면 기회의 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담은 막돌(호박돌이라고도 하는)을 주워 건성건성 쌓은 것 같으나 잘 살펴보면 제법 견고하게 돌과 돌을 잘 맞춰 쌓았다. 주변에서 나온 자연석 돌을 큰 돌과 작은 돌을 공간에 맞게 짝을 맞춰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주변의 돌을 주워 막돌로 쌓은 ‘막담 쌓기’다. 주로 한두 줄로 돌을 올려놓아 쌓는 ‘겹담쌓기’ 방식을 취한 돌담이다.

옥천 군북면 환산리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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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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