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산골 ‘물안이마을’ 독립지사 12명, 전국서 드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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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산골 ‘물안이마을’ 독립지사 12명, 전국서 드문 역사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11.13 07:04
  • 호수 916호 (2025년 11월 13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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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4〉
청양 물안이마을 독립사적.

서해의 영봉인 오서산 자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인 청양의 ‘물안이마을’은 무한천의 최상류 지역이다. 높고 낮은 산들과 농경지가 비교적 넓게 펼쳐져 경관이 수려하고 마을 주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고장이다. 많은 농가들이 친환경 농업에 종사하는 친환경 마을로 꼽히는 곳이다. 이런 ‘물안이마을’은 불과 20여 세대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 열두 명의 독립지사가 배출돼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독립지사 마을’로 정의되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마을의 독립지사들은 1896년의 제1차 홍주의병, 1906년의 제2차 홍주의병, 1919년의 3·1독립만세운동, 1920년대의 상해임시정부 활동, 또한 독립자금 모금 활동으로 1944년에 옥사한 임경호 지사 등 주요 독립지사들의 활동상은 물안이마을 주민들의 항일운동 역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청양 화성면 수정리 물안이마을 입구엔 언제나 태극기 열두 기가 휘날리고 있다. 수정리(水汀里)를 우리말로 옮겨진 물안이마을은 주민이 50명도 채 안 되는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열두 명의 애국지사가 나왔다. 열두 기의 태극기는 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물안이마을은 청양 독립운동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청양은 일제강점기 충남에서 인구가 가장 적을 정도로 군세(郡勢)가 열악했지만 176명의 독립유공자(2016년 기준)를 배출했다. 충남에서는 두 번째, 전국에서는 세 번째(경북 안동 339명, 충남 홍성 201명)로 많다. 

■ 정산 서정리 장날 독립만세운동 시작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 청양 정산면 백곡리에 살던 19세 청년 홍범섭은 경성으로 상경한다. 종로의 한 여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홍범섭은 귀가해 이웃 청년들을 집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홍범섭은 서울의 정세를 설명하고 “우리도 망국의 한을 풀게 되었다”고 밝힌다. 청년들은 함께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고 태극기 10장을 만들었다. 청양에서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진 청양 정산면 소재지인 서정리 장날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4월 5일 오후 3시, 청년들은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조기 진압 방침을 세우고 장이 서는 곳마다 경찰이나 헌병을 파견했다. 정산시장에도 일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홍범섭 등 주도 인사 10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으로 들어서자 일제 헌병들은 즉시 제압에 나섰다. 하지만 청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5분 뒤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다시 시장진입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장꾼 100여 명도 호응했다. 헌병들이 또다시 제지에 나섰지만 시위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도 인사들을 체포해 파견대로 연행했다.(-청양독립운동사) 이때 권흥규(權興圭, 1852∼1919)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독립의군부 청양군 대표로 활동했던 권흥규는 독립만세운동 당시 정산 향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권흥규는 쌀 한 말을 구해 가족에게 주고 집을 나섰다.(-독립운동사)

헌병대를 따라가면서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규모는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정산으로 들어가는 시장 북쪽 길목에 위치한 헌병대의 주재소 앞에서 권흥규는 “우리나라는 독립하여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니 빨리 물러가라”며 크게 소리쳤다. 구금자 석방 요구가 점차 거세지자 헌병들은 공포탄을 두 차례 발사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67세의 노인이었던 권흥규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헌병들 앞으로 나서며 연행자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헌병이 그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권흥규는 왼쪽 팔에 총상을 당하고도 계속 앞가슴을 내밀면서 항거했다. 헌병이 다시 권흥규의 앞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고 권흥규는 현장에서 숨졌다. ‘이날 밤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고 ‘청양의 독립운동사’는 적고 있다.

■ 농민운동·의병활동·애국계몽의 항일운동
정산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백곡리에 거주하던 청년 홍범섭이 상경해 종로의 한 여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집으로 내려와 임의재(37), 홍세표(32), 박상종(39), 윤석희(28) 등과 함께 정산시장에 모인 7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궐기한 것이 청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이다. 

4월 6일에도 계속해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오후에 지역주민들이 전날 순국한 권흥규의 시신을 일제 헌병들로부터 인수해 본가가 있는 목면 안심리로 운구했다. 권흥규의 근족인 권영진이 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 排日士權興圭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대한민국만세(大韓民國萬歲)’라는 깃발과 많은 만장(輓丈)들이 운구 행렬을 이뤘다. 헌병파견대를 떠난 300여 명의 군중들은 정산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고 안심리로 가는 길목마다 노제(路祭)를 지냈다. 집으로 가는 15리(약 6km) 길을 군중들이 뒤따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했다. 운구 행렬이 만세시위가 된 것이다.

‘기미의사 권흥규 선생 순열비’가 정산면사무소 입구에 세워져 있다. 1953년 정산중학교 교정에 만들어졌다가 1966년 초등학생 2만여 명이 의연금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정산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4월 5일 화성면에서도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화성면 산정리 마을 주민 30여 명이 태극기 2기를 세워 놓고 큰 종을 울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게 화성면 시위의 시작이었다. 화성면의 만세운동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이튿날인 4월 6일에는 전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오전 10시 화성면사무소에 모였다. 면사무소에서는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작업 인부 20여 명을 향해 시위대는 “조선은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증축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어 이미 증설된 부분을 부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월 7일에는 화성면 농암리에서 인근 화암리와 수정리 주민 70여 명이 함께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수정리는 물안이마을이 있는 곳이다. 4월 8일 화성면 화강리 김용학의 집에서 열린 결혼식에선 하객으로 참석한 21세 청년 강학남이 구장 이병규에게 만세를 권유하다 다투는 일도 생겼다. 강학남은 인접 마을에서 계속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자신의 마을에서도 이를 거행하고자 했다. 젊은 나이였기에 그는 구장 등 지지 세력이 필요했다.

청양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만세운동을 시작했지만 연일 집중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것은 청양지역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정산면과 화성면뿐만 아니라 비봉면과 운곡면에서도 이틀에 걸쳐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더욱이 일제 당시 군 거주 인원이 많지 않던 청양에서 연인원 5700여 명이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은 지역민들의 뜨거운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물안이 3·1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는 지난 2018년부터 깃대 12개를 세우고 화성 물안이마을 출신 독립지사 1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열리고 있다. 독립지사 12명은 임승주, 임한주, 임상덕, 임한영, 임준호, 김용옥,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임경호, 임긍호 지사로 모두 수정리(물안이) 주민들이었다. 청양 화성면 수정리 물안이마을에서 애국지사 12명이 나온 것은 전국에서도 드문 역사다. 이들 독립지사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총독의 포고문이 전해졌음에도 4월 5일부터 전개된 화성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기러기재와 황새봉을 옮겨 다니며 함성이 우레처럼 울리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임한주 지사 형제, 파리장서(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특사로 활동하고 비밀결사단인 동아흥산사의 국내 조직책으로 활약한 임경호 지사, 일본에서 수학 중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교민단의 의경대원과 한혈단의 단원으로 활약한 임긍호 지사 등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청양의 독립운동, 특히 3·1독립만세운동은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에서 출발한 항일민족운동이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청양군민들은 동학과 동힉농민군으로 정부와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지계사업에 반대해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홍주의병을 통해 항일 민족정신을 분명하고 강력하게 표출했다. 이는 독립의군부와 대한광복회의 활동 등으로 계승·발전돼 독립만세운동에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로써 청양지역은 농민운동,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등 구국과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항일민족운동의 일관성과 발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청양 물안이마을 독립사적.
청양 물안이마을 독립사적.
청양 물안이마을 독립사적.
청양 이세영의 성명학교터.
청양 정산 권홍규의사순열비.
청양 정산 3.1만세운동기념탑.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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