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지역에서의 3·1 독립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독립선언서’나 유인물을 배포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만세운동이 점차 확산하면서 폭력 시위양상이 나타났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부여의 3·1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구를 통해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를 수령, 3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2일 ‘병합’ 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는 식민지의 최고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으며, 식민지 지배 구조로 재편하기 위해 191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당했다. 일제는 경제적으로도 우리 민족을 수탈했는데, 191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실시해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1910~19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불법으로 토지를 침탈해 온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됐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됐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 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몰락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노동자가 됐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 차별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다.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으로 고조됐다. 이러한 전 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 결사 운동, 교육문화 운동과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돼 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말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 방안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 민족해방운동을 고양 시켰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 전달돼
부여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2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2일 부여 외에도 청주, 순천, 평강, 김화 등지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독립선언서’ 전달은 천도교의 조직을 통해 이뤄졌다. 천도교에서는 ‘독립선언서’ 2만 매를 교단 산하의 보성사에서 인쇄해 전국의 교단 조직을 통해 각지에 배포했다. 부여 지역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는 익산대교구를 통해 전달됐다. 부여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본격화된 것은 1919년 3월 6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장소는 임천 구교리였다. 임천과 은산 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박용화(朴容和)와 최용철(崔容澈)을 중심으로 은산면사무소와 임천공립보통학교(현 임천초등학교)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임천 구교리에서의 만세시위에는 1906년 홍주의진에 참여했던 홍순대(洪淳大)도 참여했다. 3월 6일의 기세를 몰아 이튿날인 1919년 3월 7일에는 부여 백마강 나루터에서 읍내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했다.
1919년 3월 7일 홍산에서 산상 횃불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헌병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홍산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옥산면 내대리 출신의 조병선(趙秉旋)이 있다. 충화면 가화리 출신의 양재흥(梁在興)은 1919년 3월 29일 서천 마산면 신장리 장날 만세시위 때 태극기를 배포했고, 유성열 또한 200여 매의 태극기를 제작, 배포했다. 부여 세도면 출신의 추병갑(秋炳甲)·엄창섭(嚴昌燮)·고상준(高相俊)·김종갑(金鍾甲)·서삼종(徐三鍾) 등이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지난해 5월 충남 최초 3·1운동선양회는 부여군 충화면 청남리에서 ‘충남 최초 3·1운동 발원 기념공원’ 준공과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기념공원은 1919년 3월 6일 충화면에서 출발해 임천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7명(박성용, 박용화, 최용철, 문제동, 황금채, 황우경, 정판동)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지난 2005년 최초로 조성됐다. 지난해 3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정비사업에 착수, 4월 준공, 5월 준공식과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세도면에서는 기미년 3월 10일 세도면 청포리에서 발원, 강경 옥녀봉(봉오제)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세도면 출신의 추병갑·엄창섭 등 13명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고 나라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자 3·1독립만세운동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 충남서 최초 조직적 독립만세운동 시초
1919년 3월 6일(음력 2월 5일) 부여에서 벌어진 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부여군이 금강문화권의 핵심 내륙 교통로라는 이점이 있었고, 부여읍과 홍산면에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던 천도교 교구의 조직을 바탕으로 발원했다. 당시 부여는 금강이 관통해 주변 지역과 인적 교류도 활발했고, 인근에 익산천도교 대교구가 있어 천도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 계획과 기미독립선언서를 충남에서 가장 먼저 입수할 수 있었다.
부여 충화면 출신의 박성요 등 애국지사 7명은 서울에서 천도교의 교인을 통해 비밀리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고, 임천장터에서 이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군중들은 임천면사무소와 임천보통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부여헌병대 임천분대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이날 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의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보다 시기상 한 달 정도 앞서 있어 ‘충남에서 최초로 조직적으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의 시초’가 됐으며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9년 3월 10일, 세도면 청포리 청포교회가 세운 창영학교의 교사로 일하던 독립운동가 엄창섭은 강경 옥녀봉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충남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한 1884년 5월 2일 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에서 태어난 양재흥은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해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 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됐다. 이에 양재흥은 고시상(高時相)·김인두(金印斗)·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해 경찰출장소로 몰려가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됐다. 양재흥은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부여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9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양재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3년에 양재흥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지금까지 부여군은 2020년 163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한 데 이어 2022년 숨은 독립운동가 262명을 추가로 발굴했다. 이로써 부여 출신 독립운동가는 모두 425명에 이르고 있다. 지난 2020년 1차 용역을 통해 발굴한 163명 가운데 25명이 서훈을 받아 추서된 지역 독립유공자는 94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부여군에 본적을 둔 사람이다. 연구용역을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새로 확인된 기록도 있다. 폐정개혁안을 실천하려 했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존재를 확인했다. 집강소 활동 기록이 확인되는 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도에서는 부여가 유일했다는 것이 용역을 맡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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