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무대로 올린 바르셀로나 ‘라 메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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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무대로 올린 바르셀로나 ‘라 메르세’
  • <공동취재단>
  • 승인 2025.11.20 07:13
  • 호수 917호 (2025년 11월 20일)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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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축제 포화시대, 지역성을 담은 축제로 변해야 한다⑪

지역축제를 둘러싼 논란과 비판은 해마다 반복된다. 과도한 상행위, 주민 동원, 유사 콘텐츠, 과장된 실적 등은 축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축제는 관광을 넘어 지역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는 공공의 장이어야 한다. 이에 홍주신문을 비롯한 5개 지역언론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2025 공동주제심층보도지원 사업을 통해 국내·외 축제 현장을 공동 취재·보도함으로써 지역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라 메르세 2025 축제를 맞아 테라사의 미뇽스 팀이 산 자우메 광장에서 보강대 ‘포르라’와 지지대 ‘마니야스’를 갖춘 9단 2명 탑 ‘카스텔’을 완성하고 있다. 

매년 9월 바르셀로나는 대성당 앞 광장부터 고딕지구 골목골목까지 음악과 불꽃, 거대한 인형과 인간탑이 어우러진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찬다. 

그 시작은 16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자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자비의 성모 메르세에게 보호를 기원했고 기적처럼 재앙이 멈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성모 메르세는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후 1871년 바르셀로나시 정부가 9월 24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고 제도화하면서 ‘라 메르세(La Mercè)’는 도시 축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1902년을 기점으로 대형 퍼레이드, 인간탑 쌓기, 불의 행진, 거대 인형극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바르셀로나의 역사와 시민의 기억을 담아냈고 프랑코 독재 시기 카탈루냐어와 문화가 억압받을 때조차 라 메르세는 살아남아 카탈루냐 지역의 정신을 담아내는 대표적인 도시 축제로 자리잡게 됐다. 

올해도 라 메르세의 막은 시청 앞 산 자우메(Sant Jaume) 광장에서 열렸다. 사람 키의 몇 배에 달하는 역사와 신화 속 인형들이 등장해 전통 음악과 함께 움직이며 서사를 풀어내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매년 주제를 바꿔 도시의 역사와 기억, 시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개막 퍼포먼스에서 인형들은 마치 파티장에 초대된 것처럼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몸짓을 선보였다. 관람객 대부분은 카탈루냐어로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였고 거인을 본딴 인형을 들고 노래를 따라부르며 즐기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 시청 관계자는 “라 메르세는 종교적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그 뿌리는 시민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으로 발전했다”며 “이 축제의 소속감은 신앙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기념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즉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라 메르세는 단순한 휴일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도시의 자부심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는 “라 메르세가 상징하는 것은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바르셀로나의 시민정신”이라며 “이 축제는 여전히 공동체 자부심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라 메르세 축제 ‘톡 데 이니시’ 행사에서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 인간탑 ‘카스텔’과 불의 행진 ‘코레포크’
라 메르세에서 가장 큰 환호를 받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단연 ‘카스텔(Castell)’이다. 카탈루냐어로 ‘성채’를 뜻하는 인간탑 쌓기 행사는 2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이다. 약 300~400명의 주민이 한 팀을 이뤄 15m가 넘는 탑을 쌓아 올리는 장면은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가장 꼭대기에 올라서는 ‘안사네타(Enxaneta)’는 보통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어린이로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는 순간 광장 전체가 환호성으로 뒤덮인다. 카스텔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자발적인 시민들이다. 이들에게 소속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개인적 명예이자 공동체의 긍지다. 이 전통은 200여 년의 세월 동안 시민 협동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다. 

또 다른 명물은 ‘코레포크 (Correfoc, 불의 행진)’. 악마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불꽃을 휘두르며 골목을 질주하는 행진이다. 

불과 소리, 함성, 음악이 뒤섞여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불꽃놀이가 된다. 이 행사는 중세 카탈루냐 민속에서 비롯됐으며 ‘불을 통과해 재탄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시민이 기획하고 시청은 지원 맡아
라 메르세의 가장 큰 특징은 행정이 주도하지 않는 축제라는 점이다.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축제의 주체가 시민이 되도록 제도적으로 설계했다. 시 관계자는 “라 메르세가 단순한 관광 이벤트가 아닌 도시 정체성의 표현으로 남기 위해 기획과 운영의 중심을 항상 시민과 문화단체에 둔다”고 밝혔다 

실제 프로그램의 기획·운영은 지역 협회, 예술단체, 주민공동체가 맡고 시의회는 예산·안전·기술적 지원에 집중한다. 

모든 주요 결정은 사전 협의와 협력과정을 거치며 예술적 방향에는 행정이 개입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시민단체 참여 프로그램이 100% 시의회 공공예산으로 지원된다는 점이다. 

상업 후원이나 별도 모금 없이도 축제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다. 

시 관계자는 “핵심은 공동책임”이라며 “행정은 안전과 기반을 보장하고 주민들은 주체로서 참여하는 구조가 라 메르세의 지속성을 지탱한다”고 강조했다. 

■ 시민의 손으로 지탱하는 전통 
라 메르세의 인형 퍼레이드 ‘게간츠(Gegants)’와 대두탈 캐릭터 ‘카프그로소스(Capgrossos)’는 시청이 직접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각 동네 협동조합과 문화단체가 직접 관리한다. 

스페인의 대표적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Verkami’에는 매년 “우리 마을의 거인을 복원하자”는 프로젝트가 올라오고 수많은 시민이 소액을 보태며 축제의 일원이 된다.

시청 문화국은 “라 메르세는 바르셀로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공동프로젝트”라고 정의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은 1년 내내 이어진다. 아이들은 학교나 동호회를 통해 전통춤을 배우고 성인들은 공연단을 구성해 퍼레이드 연습을 이어간다. 시청은 이를 위해 전통문화학교와 어린이 공동체 프로그램을 운영해 세대 간 전승을 제도화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가는 계승자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는 게 시의회의 설명이다. 

■ ‘Cultura Viva’ 축제의 철학을 일상으로
시민들이 단순히 즐기지 않고 책임감있는 보존자로서 참여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꿀뚜라 비바(Cultura Viva)’ 프로젝트다. 문화유산 단체, 청년단체, 자원봉사자 등이 협력해 “축제를 모두의 공동 자산으로 인식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프로젝트는 ‘축제를 통해 시민의식을 키운다’는 라 메르세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오버투어리즘 속 ‘균형잡힌 축제’
최근 바르셀로나는 오버투어리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라 메르세는 여전히 ‘관광객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 ‘시민의 축제’로 남는다. 

그 비결은 분산형 무대 운영이다. 도심집중을 피하고 8개 구역 26개 장소에 공연과 전시를 배치한다. 이 방식은 지역 간 균형을 유지하면서 소음·혼잡 문제도 줄이는 효과를 낸다. 행정은 또 안전·청소·교통·에너지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다. 

재활용 소재 사용, 플라스틱 제한, 공연 무대의 재생에너지 사용 등 환경 지속가능성 계획이 시행 중이다.

또한 폭염·폭우에 대비해 그늘막과 수분 공급 지점을 설치하고 일정 일부를 조정하는 등 기후위기 대응을 축제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고 있다.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의례 독수리 ‘라 알리가’가 산 자우메 광장에서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 ‘게스트 도시’로 확장된 문화 연대 
2007년부터 도입된 ‘게스트 도시 (Guest City)’ 제도는 라 메르세를 세계도시 간 문화 교류의 장으로 확장시켰다. 매년 한 도시를 초청해 공연, 전시, 워크숍을 함께 연다. 

2022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그리고 2023년에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가 초청돼 각 도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공연·전시·워크숍 등을 선보였다. 특히 키이우는 거리예술과 음악으로 전쟁의 현실 속에서도 이어지는 문화의 힘을 전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올해 게스트 도시는 영국의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를 상징하는 꿀벌이 거대인형 퍼레이드에서 등장해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노동자 연대 정신과 도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Bee for Barcelrona’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축제가 열리는 8개 구역 26개의 장소 곳곳에서는 맨체스터 출신 예술가들의 거리 공연, 사진전, 댄스 워크숍 등이 곳곳에서 열려 두 도시의 문화가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어내 도시 간의 연대를 체험하게 했다. 

관계자는 “게스트 도시 프로그램은 다른 세계 주요 도시와 교류를 가능케 하며 바르셀로나가 ‘창의적이고 축제 친화적인 도시’라는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 행정은 주도하는 것이 아닌 함께 가는 것 
라 메르세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형 축제 중 하나로 최근 몇 년 사이 축제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가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구조’ 덕분이다.

라 메르세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시민들이 그 축제를 ‘자신의 것’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축제가 된다는 점이다. 시청은 방향을 제시하거나 통제하기보다 시민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설계하고 안전망을 마련하는 조력자로 함께 걸어간다. 이런 태도가 축제를 ‘행정의 행사’가 아닌 공동체의 문화로 자리잡게 했다. 

결국 경청하고 기반을 마련해주며 지역사회조직의 역량을 신뢰하는 자세야말로 축제를 진정한 공동의 정체성으로 이끄는 핵심이다. 그것이 바로 라 메르세가 200년 넘는 세월 동안 시민의 자부심으로 이어져 온 이유이며 오늘날 세계 각 도시 축제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도시의 수호자는 성모가 아니라 시민이다. 불꽃이 꺼진 뒤에도 인형을 고치고 무대를 정비하며 다음 해를 준비하는 그들의 손끝에서 도시는 재탄생한다.

라 메르세의 본질은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그 축제를 이어가는 시민의 일상 그 자체다.

 

공동취재단.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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