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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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12〉
  • 글=조현옥 전문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0.2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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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 합덕성당 본당의 야경.

황무실에서 나와 합덕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석양이 지고 있는 가운데 길 옆에선 소들이 울어댑니다. 나무 한 그루 밑에 널빤지를 올리고 야외 외양간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소 두 마리가 양쪽에 매여 있고 웬만한 축사에서는 볼 수 없는 방목형 외양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지 못하고 사진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드문드문 네 마리 정도가 키워지고 있군요. 행인의 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두 눈으로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오다보니 손수레에 잔뜩 고구마 순을 싣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입니다. 아무래도 그 녀석들 저녁밥인 것 같습니다. 옛날에 꼴을 뜯어 먹이던 소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느슨해진 걸음을 재촉합니다. 큰 산업단지가 들어서는지 엄청나게 넓은 땅이 반듯하게 깎여 있군요. 고구마를 다 캐어내고 홀가분한 밭을 지나면서 올해 고구마 수확이 좋았노라고 자랑하시는 밭주인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시간입니다. 길은 이미 어두워져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바쁘게 지나는 차들 옆을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차량이 비추고 가는 불빛을 가로등 삼았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도 방법을 찾을 수도 없이 마냥 걸음을 뗄 수밖에 없을 때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걷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생의 암흑을, 인생의 혼란기를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때 그대여, 차량이 비추는 저 불빛을 가로등 삼아 조금씩 힘을 내십시오.

차량으로 합덕을 들어가던 기억을 떠올리며 갈래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지막 언덕을 올라갈 때는 저 멀리 아파트 불빛이 어렴풋이 보여 이제는 정말 잘못 들어섰구나 애태우면서 무거운 발을 떼었습니다. 삼십분이면 족할 것 같던 계산은 1시간 반을 훌떡 넘기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언덕길을 넘어 불 꺼진 합덕성당 언덕배기를 쳐다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보통 평일 저녁미사가 있으려니 했으나 주인 없는 성당은 이미 문이 닫혔고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서 성당마당을 걸으니 마당 가득 국화향이 납니다. 달빛에 얼핏얼핏 모습을 드러낸 국화와 ‘합덕성당 125주년’ 현수막이 보입니다. 

합덕성당은 1890년 초대 주임인 퀴를리에 신부의 부임으로 시작됩니다. 이전에 두세(Doucet) 신부가 박해 이후의 신자들에게 판공을 주기는 했으나 그때는 본당 설정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퀴를리에 신부가 지금의 이 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닙니다. 부임 초 그는 2년간이나 어느 곳에 본당을 세워야할지 고심했다고 합니다. 한때 교우가 가장 많았던 서산 소길리(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마침내 1892년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정착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양촌도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보건데 적합하지 않아 퀴를리에 신부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고 큰길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한 창말, 즉 현재의 합덕 성당으로 본당을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1898년에 창말로 본당을 이전하면서 사제관과 성당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에 완성됐다고 하는군요. 처음 합덕으로 이주했을 당시 주변에는 두 세 명 정도의 교우들만 살고 있었으나 개종 운동이 일어나고 교우들이 이주하면서 교우촌으로 변화했다고 하는데 교세가 증가하자 1929년 당시로서는 보기 드믄 큰 성당을 지어 봉헌하던 날 ‘경향잡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하네요.

“합덕, 가재(서산 상홍리), 예간, 세 지방의 수천 명 교우가 일시에 모여와 합덕 70여호의 교우 집은 모두 만원이 되었으며… 익일 9일에는 아침 7시에 주교 각하께서 축성식을 거행하신 후 미사를 드리실 때 천여 명에게 성체와 102명에게 견진성사를 주셨더라… 이 경사를 미리 들은 관공서 직원과 외교 유력자들은 축하하는 정을 표하기 위해 다수히 참예하였으며 그 외에 구경삼아 모여든 외교인은 무수하여 8, 9일 양일 동안의 합덕 동리는 사람바다를 이루었더라.”

사실 합덕성당은 오래전부터 보육원을 운영해왔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답니다.  1908년부터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를 거두어 유모가 있는 교우 가정에 양육비를 주고 기르게 한 것이 발단이 돼 그때부터 40년 동안 300여 명의 아이들을 양육했다고 하는군요. 1947년부터는 성가소비녀회 수녀들이 보육원을 전담했고, 전쟁 후 고아들이 많아지자 1952년에 당진 본당에도 분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성장해 독립해가자 1970년 2월 1일에 교구 차원에서 자연 해산됐다고 하는군요. 그래서일까요? 합덕성당은 많은 인원이 숙박할 수 있는 유스호스텔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사목의 일환이지요. 

배가고파 성당 앞에 있는 오래된 보신탕집에 들러 밥을 먹고 싶었으나 그곳도 문을 닫았는지 불이 꺼져 있습니다. 이렇게 그냥 합덕성당을 지나갈 수 없어 다시 돌아와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6·25때 얽힌 가슴 아픈 사연들을 들어야겠습니다. 합덕 일대 비옥한 땅이 많아 가까운 교우촌이 형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는지 주변에 공소가 여럿 됩니다.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성당인 합덕성당의 아름다움을 다시 전하게 될 때까지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시길.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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