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홍주순교성지, 80여 년간의 순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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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80여 년간의 순교 터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1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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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6>
▲ 천주교 신자들이 갇혔던 홍주감옥(증거터) 순교지.

홍주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나온 곳
신자들 갇혔던 감옥(증거터), 참수·생매장한 순교터, 매장터 공존
박해시기 동안 수많은 순교자 등을 낸 홍주지역 최대의 순교 터
홍주순교성지 순교자들 참수형보다 교수형 갖가지 남형 등 순교


 

홍주순교성지는 기록상으로 212명의 순교자가 나온 순교 터이다. 무명의 순교자까지 합하면 1000여명이 순교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나온 곳으로도 알려졌다. 그중 4명의 순교자가 복자품을 받았다. 홍주순교성지는 증거터, 순교터, 매장터 등 3곳이 함께 있는 순교성지다. 홍주순교성지에는 순교자들이 갇혔던 감옥(증거터)이 있으며, 홍주성 밖에는 신자들이 참수 당했거나 생매장당한 순교터와 매장터 등 3곳이 공존하고 있다.

1790년 정조 때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성지에는 당시 어떤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 4대 박해 이외에도 이곳 홍주순교성지에선 지속적으로 이 일대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던 것이다. 이중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이곳에서의 처형된 천주교 신자 수가 1000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다. 때문에 그 이전 80여 년 동안 처형된 숫자는 수천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신자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편리함을 위해 생매장형이 시행되기도 했다. 신자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개울 한 가운데에 있는 둠벙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 홍주성 옥터의 내부감옥 모습.

■박해시기 홍주지역 최대의 순교 터
이렇듯 홍주순교성지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도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시킨 순교성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홍주지역은 바다와 연접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초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전국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배교를 강요당했으며 이를 거부한 신자들은 관아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천주교도들을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덮어 생매장한 곳은 홍주성 북문 밖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교수형에 처해진 천주교도의 시신을 매장한 곳도 북문 인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홍주성 순교자는 211명에 이르며, 무명 순교자를 포함하면 실제 순교자 수는 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홍주성내에는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넋을 기리는 ‘신앙증거터’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를 하는 대표적인 순교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홍주성은 의병의 항쟁지로서, 천주교 순교성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박해시기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낸 홍주지역 최대의 순교 터였던 이곳 순교자들의 옥중생활은 비참하다 못해 처참했을 것이다. 형벌에 의한 장독, 굶주림과 질병, 옥리들의 괴롭힘 등은 옥중생활을 단축시켰을 것이고,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던 것이다. 게다가 옥중 교수형에 처해진 순교자의 수가 많았던 것은 박해자들이 손쉽게 신자들을 처리하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중 순교자에 대한 기록으로는 모두 114명이 교수형과 옥사로 순교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천주교 홍주순교성지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1866년에 시작되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시기에 탄생하였다. 교회 순교록에는 모두 114명(혹은 115명)의 순교자가 이 시기에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는 1868년 4월∼7월의 순교자만 모두 102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중복되는 순교자수는 17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기록상의 병인박해 순교자수는 199명(혹은 200명)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홍주순교성지의 순교자 총수는 초기의 순교자 8명(혹은 9명), 중기의 순교자 4명, 병인박해 순교자 199명을 합해 모두 211명(혹은 212명)에 이른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을 감안한다면, 실제의 순교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홍주순교성지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오직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127명의 순교자는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참수 2형(1868년의 유 마르타는 참수 혹은 교수 불확실), 미상 8명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1868년 5월에는 홍주 원머리 출신의 신자들 4명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동시에 생매장되었다(최대 생매장 순교자는 9명)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홍주순교성지의 순교자들은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 홍주성지성당 전경.

■병인박해 전후 충청지역 최대의 순교지
1866년 병인박해 이전까지 19세기 중반의 조선 천주교회에서 교세가 가장 번성한 지역은 충청도였다. 관변 자료인 ‘포도청등록’과 교회 사료인 ‘치명일기’를 비롯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기록된 전체 신자 수는 3475명이다. 이 중 출신지가 분명한 신자 937명 가운데 42%를 차지하는 396명이 충청도의 신자다. 이는 병인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의 절반 가까이 되는 이들이 충청도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근거다. 곧 충청도가 병인박해 시기 조선천주교회의 신앙의 중심지였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1866년 12월의 자료에 조선천주교회는 1861년 10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설정한 8개 사목구로 나뉘어 있다. 이 중 5개 사목구가 충청도지역이다. 배론 성 요셉 신학교를 제외한 1861년 충청도 교회 통계를 보면 상부 내포 홍주지역(홍주, 면천, 당진, 덕산, 아산, 온양, 신창, 예산, 청양, 대흥)에 387명의 신자가 있었다. 하부 내포 서부충청지역(태안, 서산, 해미, 결성, 보령, 남포, 비인, 서천, 홍산)에는 신자 170명이 거주했다. 베르뇌 주교가 작성한 이 통계를 보면 충청도지역 신자의 50% 이상이 내포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상부 내포지방 신자 비율이 가장 높다. 결국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충청도교회의 중심지가 바로 홍주(洪州)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61년부터 1866년 병인년까지 충청도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는 모두 8명이다. 다블뤼 주교와 조안노·랑드르·리델·페롱·칼래·오메트르·위앵 신부가 그들이다. 2월 베르뇌 주교의 체포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3월 배론 성 요셉 신학교 교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면서 충청지역으로 확산됐고, 충청도교회는 풍비박산이 났다. 1866년 12월 당시 충남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는 공주 109명, 홍주 43명, 해미 28명 등 총 180명으로 집계됐다. 눈여겨볼 점은 갈마진두 순교자를 제외하고 병인년 충청도지역 순교자 대다수가 신중한 판결을 위해 3번 심리하는 삼복제를 따르지 않고 곧바로 사형됐다는 점이다. 충청도에선 순교자들이 일반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장살과 아사로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홍주와 해미에선 생매장과 같은 법이 정하지 않은 형벌이 남용됐다. 홍주에서는 첫 순교자인 원시장(베드로)이 1792년 옥사한 이후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 이여삼(바오로), 최대종(요셉) 등이 순교했다. 1866년에는 49명의 신자가 홍주관아와 진영에서 순교했다.

이렇듯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홍주성 내에 흩어져 있는 신앙증거터, 옥사,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 등 홍주순교성지의 순례길이 전국과 세계의 순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홍주순교성지의 안내자이자 지킴이는 바로 홍주성지성당 최교성 담임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들이다. 이와 함께 무보수 봉사를 자청하며 돕고 있는 홍주성지성당 김한용 사무장의 헌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평가다. 금마면 인산리가 고향인 김한용 사무장은 홍주순교성지의 순례길에 대한 설명 등을 도맡고 있는데, 집안 전체가 천주교 신자들이다. 8남매의 장남인 김 사무장은 ‘시몬’이라는 유아세례를 받았고, 8남매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김 사무장의 막내 동생인 김찬용(베드로) 씨는 신부가 되어 신앙인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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